대제학은 정2품직으로 문필에 관한 일을 총괄하는 위치에 있어 문과 출신 관료에겐 영예로운 자리였다. 학문이 뛰어나고 매사에 청렴해 '청백리'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런 대감이 사랑채에서 목숨을 끊은 것도 범상치 않은 일이었으나 간룡척(看龍尺)이 사랑채 문갑(文匣)에서 발견되자 분위기가 이상한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서감찰의 보고에 의하면, 간룡척은 여러 사람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나 은밀히 대비전에서 내린 것으로 결론 내렸다. 벽파의 중신들이 조정에서 내쫓기자 와해된 것 같았으나 그들이 다시 규합해 대비전을 출입한다 들었으니 이 또한 범상치 않은 일이 아닌가.'
그들을 불러들일 실마리를 찾아야 했다. 인사권을 비롯해 조정의 대소사는 상감의 손에서 결단나는 시점이니 사산(四山) 밑에 웅크린 양반들을 불러 모을 계책은 간단한 게 아니었다.
'간룡척이 나타난 건 수은묘를 영우원으로 격상하고 수원부 관가 뒷산에 천장(遷葬)해 현륭원으로 삼으면서부터다. 그 자리가 반룡농주형(盤龍弄珠形)이니 당연히 대비전에선 발복할 수 없도록 비방을 마련했을 것이다. 네 명의 풍수사가 살해된 것이 간룡척인데 어떤 연유로 이게 대제학 대감의 사랑채에 있단 말인가?'
정약용은 관저를 서성이며 아래턱을 감아쥔 채 골몰하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칠석을 눈앞에 둔 시점인데 기우제를 올린 탓에 약비(藥雨)가 내리고 있었다. 현장을 돌아본 후 관저로 돌아온 서과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주장을 재차 확인했다.
"나으리, 대제학 대감의 사체에 난 액흔은 검붉고 길이가 좌우의 귀 밑 발제(髮際)에 이릅니다."
"어느 정도냐?"
"가로가 9촌 이상입니다. 대제학 대감이 사용한 물건과 숨통 아래 액흔이 같은 것으로 보아 주검에 이르게 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발이 방바닥에서 떨어져 있지 않은 것으로 보면 액흔이 얕을 것으로 보았으나 뜻밖에 깊었다. 이것은 <검시체식>에 어긋나는 결과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대제학 대감이 사용한 건 흰 명주 수건이니 액흔이 당연히 얕을 것이지만 나타난 결과는 반대였다. 가늘고 질긴 마를 꼬아 높은 곳에 걸어 사용할 때처럼 액흔이 깊을 것으로 보았으나 얕다는 건 사건을 억지로 꾸민 냄새가 짙었다. 서과는 사건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강조했었다.
"나으리, 낮은 곳에서 목을 맨 경우, 몸은 바닥에 누워있거나 옆으로 기울거나 엎어져 있기 마련입니다. 옆으로 누웠으면 목맨 흔적이 비스듬하게 사선(斜線)으로 시작돼 숨통 아래를 가로지릅니다. 엎어져 누웠으면 액흔은 숨통 아래 있기 마련으로 흔적은 귀 주변에서 시작되나 발제(魃際)에 이르지 아니합니다. 대제학 대감의 주검은 발제에 이른 액흔이 9촌임을 볼 때 누군가 올가미를 뒤에서 걸어 당긴 것으로 봄이 옳은 판단 같습니다. 더구나 대제학 대감은 주시관입니다. 알성시(謁聖試)가 머지않은 시점에 일어난 사건이니 소인이 과장 주변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겠습니다."
서과가 나간 뒤 정약용은 새삼 절일제(節日製)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절일제는 4개가 있었다. 1월 7일의 인일제(人日製), 3월 3일의 삼일제(三日製), 7월 7일의 칠석제(七夕製), 9월 9일의 국제(菊製)로 절일에는 성균관 유생을 고시하여 1등에겐 문과전시나 회시에 직부할 수 있는 특권을 주었었다.
그러나 인일제와 칠석제는 나중에 생긴 삼일제와 국제에 밀려 1등이라 하더라도 문과 회시에 직부할 수 있는 권한밖엔 주지 않았다.
알성문과는 상감이 문묘에서 작헌례를 올린 뒤 명륜당에서 유생들을 고시해 성적우수자에게 급제를 준 것으로 다른 시험과 달리 단 한 번으로 당락이 결정되는 단일시(單一試)인데다 고시기간이 짧은 촉각시(燭刻試)였다.
그래서인지 알성문과는 다른 전시보다 훨씬 많아 독권관이 열 명이었고, 대독관이 스무 명이었다. 채점에 있어서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 문제는 피했으며 성균관 유생에게만 응시자격을 주었다가 나중에야 지방 유생에게도 주웠다.
알성시는 다른 시험관 달리 친림과인 까닭에 상피제가 없어 시관의 자제도 응시할 수 있었다. 10과 중 1편만 고시했으므로 운이 좌우하는 과거라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요행을 바라는 무리들이 많이 모여들어 지난 숙종 때엔 만 여민이나 되었고 선대왕 때엔 1만 8000명이나 응시했었다. 그렇다 보니 과장은 곳곳이 아수라장일 수밖에 없었다.
'대제학 대감이 주시관이었던 점을 놓고 본다면, 상피제가 없으니 가까운 친족이나 혈손들이 응시할 수 있을 것이다. 대제학 대감은 사위뿐이니 우선 그쪽부터 조사하는 게 순서일 것 같구먼.'
서감찰을 불러들여 사건이 일어났을 때 주위를 잘 탐문하는 감찰실 금리(禁吏)를 뽑아 수사할 내용 몇 가질 귀띔하고 성균관 쪽에 내보냈다.
예전과 달리 정조 시대엔 과시(科試)가 인재등용의 방법이라고 목에 힘을 준 쪽은 양반이라 일컫는 사대부들이다. 지방유생이라 할지라도 '양반관료'에 들어갈 수 있는 등용문이 과시였다.
개인의 능력과 노력을 평가받아 관료로 선발하는 방식에서 자신만은 결코 '점액(點額)'이 되어 뒤처지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비록 가진 것이 없더라도 관료세계에서 우뚝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평지돌출(平地突出)의 배짱이라도 있어야 했다.
'관료가 될 수 있는 길은 과시(科試)라는 등용문을 뛰어 넘어야 한다.'
황하 상류의 협곡 용문(龍門)은 물살이 빠르고 뾰쪽한 돌이 많아 전설이 생겨났다. 수천 마리의 잉어가 협곡에 도전해 난관을 뛰어넘은 잉어만이 용이 된다는 전설이다. 그런 이유로 수많은 잉어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문의 협곡을 뛰어넘었다.
물살에 휩쓸려 이마에 상처를 입은 잉어가 태반이었다. 난관을 뛰어넘으면 용이 되지만, 온 힘을 다해 솟구쳤는데도 바위에 부딪쳐 비늘이 벗겨지거나 긁히어 상처를 입은 경우가 점액이다. 등용문이라 할 때, <후한서>엔 자가 원례(元禮)인 이응(李膺)에 대해 그런 말을 남겼지 않은가.
<나라의 기강이 허물어지고 조정은 부패와 퇴폐풍조가 만연할 때 절조를 굽히지 않고 부패한 자들과 싸웠기 때문에 '천하의 모범은 이원례'란 말이 생겨났다.>
그러니까 등용문이라 하면 '용문에 오른다'는 뜻으로 어려운 난관을 돌파하려 도약의 발판을 삼을 기회를 의미한다. 이것은 모여든 선비나 장수들이 자기 이름을 나타내어 정의로운 정치에 몸을 바친다는 결의를 다진 것이다.
사헌부 수찬으로 있는 자신으로선 하나의 신조가 마음에 굳어 있었다. '진실은 감춰도 언젠가 밝혀진다(藏頭露尾)'는 점이다. 이번 사건만 해도 그랬다. 정2품인 대제학 대감이 무슨 이유로 간룡척을 보관하고 있는가에 골몰해 있었다. 가을비에 젖은 서과가 오후 늦게 관저에 들어섰다.
"소인이 성균관 옆 반촌에 들렸을 때 한 아낙이 반수당(泮水堂)에 대해 들려주지 않겠습니까. 지난 숙종 대왕 때도 그런 일이 있었답니다만, 자신이 밭에서 나물을 캘 때 노끈을 발견했답니다. 땅에 묻힌 끈을 발견했는데 그걸 잡아당기니 끈이 시험장인 반수당으로 들어가더랍니다."
"어허!"
"성균관 유생이 대나무 통을 매설해 통 속에 노끈을 넣은 후 과거장에서 시험문제를 노끈에 매달아 신호를 보내면 밖에 있는 패거리가 줄을 당겨 시험문제에 답안을 작성해 노끈에 묶어 보낸 것입니다. 그로 인해 과시를 보는 반수당이 다른 곳으로 바뀌었답니다."
"다른 건 없더냐?"
"알성시는 수자가 많다 보니 온갖 부정이 동원된 것으로 보입니다. 응시자가 홀로 책을 베끼는 것은 물론, 출제자와 채점자가 공모하거나 양반가의 자제들에게 후한 점수를 주거나 친인척을 뽑는 일이 비일비재하답니다."
"하긴 그렇다. 어느 시대에나 나타난 희한한 부정은 이젠 범죄로 관례가 되어 굳어지고 있지 않느냐. 해서, 이번의 알성시는 성균관의 반수당이 아니라 창덕궁의 영화당 동쪽 마당에서 펼쳐진다. 전하께서 친림하는 자리니 부정을 범죄 의식 없이 저지른다면 중벌을 받을 것이다."
금리(禁吏)는 밖에 나갔다 오더니 어떤 일인지 대제학 황헌식 대감의 사위 이진원(李鎭遠)에 대해 입을 열었다.
"이진원은 번동(樊洞)에 사는 데 그의 아비가 벌리사(伐李司)였다고 합니다."
"흐음, 벌리사라···."
"어떠한 연유로 대제학 대감의 사위가 된 것인진 모르나 들리는 말은 그의 아비가 몰락한 양반이었다 합니다. 하온데, 이진원은 두 해 전 과시에 합격해 벼슬길에 나갔는데 그 정황이 심상치 않다는 소문입니다."
한양엔 창덕궁을 중심으로 가회동이나 재동 등 북촌에 위치하여 궁안을 드나드는 사람이 살았고, 청계천 언저린 역관이나 의원 등 중인이 살았다. 인왕산 자락엔 집값이 싸 가난한 서리나 하급관리가 관청이 가까운 인왕산 자락으로 와서 많이 살았으나 번동은 달랐다.
종로구 효제동의 예이동(刈李洞)이나 종이촌(種李村)은 이씨가 흥성하는 걸 막기 위해 고려 조정에선 한양 동쪽에 오얏나무를 많이 심었다가 무성해 지면 베어버리고 '오얏나무를 벤다'는 뜻의 예이동이라 했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고 한양을 도읍지로 삼자 이곳이 '이씨를 배출하는 곳'이란 뜻으로 종이촌이라 불렀고 보면 도봉구 번동은 벌리(伐李)라 부르는 곳으로 이씨의 번성을 막기 위해 오얏나무를 벤 관청을 둔 곳이다. 물론 이런 것들은 참언(讖言) 때문에 생긴 것이지만 고려 조정의 정성이 부족했거나 나라의 운이 다했는지 몰라도 단순한 참설로 끝난 건 다행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몇 번이나 머뭇거리다 금리(禁吏)가 내놓은 말은 정약용을 긴장시켰다. 그것은 청렴하다고 소문난 대제학 대감의 위명에 먹칠하는 소문이었다.
"이진원은 벌리사(伐李司)를 아비로 뒀습니다만, 홀로 인왕산 자락을 오르내리며 '옥류전(玉流泉)' 동인으로 활동했습니다. 그곳엔 중인들의 모임인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가 있는데 일종의 시문학 동인입니다."
"송석원시사란 무슨 뜻인가?"
"그곳 인왕산에 사는 서당훈장 천수경이 집안은 가난해도 글 재주는 있나봅니다. 평생을 글 읽기 좋아하고 시를 잘 지었는데 그는 옥류천 위의 소나무 바위 아래 초가를 짓고 자신의 호를 송석도인(松石道人)이라 했답니다. 인왕산의 물 줄기는 옥계(玉溪)라고도 하는데 자신이 태어나 함께 자란 친구들과 거문고 뜯으며 자주 술 잔 들고 시를 읊은 공동체가 송석원시삽니다. 이것을 흉내 내어 이진원은 '옥류천'이란 모임을 만들었는데 모두들 몰락한 양반 자제라 들었습니다."
"흐음, 몰락한 양반 자제라?"
"두 해 전, 이진원이 과시에 합격하자 모임은 힘을 얻어 경기 일원에까지 범위가 넓혀지고 숫자도 불어났답니다. 위인이 영특하니 뒷배를 보아준 사람도 나타난 것으로 보입니다. 자세한 건 알 수 없습니다만, 이번 영화당 동쪽 마당에서 열리는 알성시에 '옥류천' 동인들이 대거 참여할 것이란 소문이 돌았습니다. 허나, 대제학 대감이 세상을 버리자 알성시에 응시하려는 자가 상당히 줄어든 것으로 보입니다. 소인의 생각엔, 과시와 대제학 대감과는 깊은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송석원시사는 한 달에 한 번 날짜를 미리 정했고 그때마다 제목을 정해 시를 지었다. 대개 정월 대보름이나 삼짇날, 초파일, 단오절, 유두 등이었고 이번 칠석은 과시를 끝낸 다음으로 정했다.
'옥류천'도 마찬가지였다. 이전의 모임 날짜는 알 수 없으나 그들 역시 영화당에서 열리는 알성시 과거가 끝나면 견평방에 자리한 내외술집에서 동인 모임을 갖기로 한 것이다.
정약용은 자신이 직접 이진원이 과시에 급제한 경로를 파악해 보기로 작정했다.
[주]
∎금리(禁吏) ; 사헌부 하급 직종
∎약비(藥雨) ; 필요할 때 내리는 비
∎점액(點額) ; 상처입은 잉어. 낙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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