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로 취급받는 소녀가 들려주는 이야기

[리뷰] 캐서린 밸런트 <소녀와 비밀의 책>

등록 2011.03.09 17:58수정 2011.03.09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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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소녀와 비밀의 책> 겉표지

<소녀와 비밀의 책> 겉표지 ⓒ 노블마인

판타지 소설에는 다양한 동물들이 등장한다. 사자나 호랑이 같은 현실 속의 동물들은 물론이고 신화와 전설에서 접할 수 있는 동물들부터 작가가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동물들까지.

사자의 몸에 독수리의 날개가 달린 그리핀, 새의 몸에 여자의 얼굴을 가진 탐욕스러운 성품의 하피, 검은 물소의 외모를 가졌지만 시선으로 상대를 죽일 수 있는 카토블레파스, 물범이지만 가죽을 벗으면 인간으로 바뀌는 셀키 등이 판타지의 세계를 장식한다.


작가의 상상력은 인간의 외모도 멋대로 변화시킨다. 배에 입이 달린 사람, 가슴이 세 개인 여성, 입 대신에 펠리컨 부리가 삐죽 튀어나온 사람, 다리 끝에 물갈퀴가 달린 사람도 있다.

현실에서 이런 존재와 마주친다면 기겁을 하겠지만 판타지의 세계에서라면 자연스럽다. 오히려 반인반수의 괴물이 등장하지 않는 판타지가 이상하게 보일 정도다.

왕궁정원에서 혼자 살아가는 소녀

캐서린 밸런트의 <소녀와 비밀의 책>에서도 위의 동물들이 모두 등장한다. 독특한 점이 있다면 작품에 직접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 속의 한 소녀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아주 오래 전, 술탄의 왕궁정원에 한 소녀가 살고 있었다. 부모가 누구인지, 이 소녀가 어떻게 해서 왕궁정원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이 소녀의 외모는 일반 사람들과 달라서 눈꺼풀과 눈 가장자리가 잉크처럼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다. 마치 한 마리의 너구리나 팬더곰처럼.


이런 외모 때문에 사람들은 소녀를 악마라고 생각해서 멀리하게 되었고, 소녀는 혼자 왕궁정원에서 나무열매를 따먹으며 노숙을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술탄이 '소녀를 함부로 내쫓았다가는 악마의 분노를 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내쫓기보다는 그냥 방치하는 쪽을 택했다.

이 소녀에게 어느날 궁전의 소년이 다가와서 말을 걸고, 소녀는 소년에게 자신의 비밀을 말해준다. 자신의 눈가에 있는 반점은 요정이 아주 작은 글씨로 촘촘히 적어놓은 이야기라는 것이다. 여기에 흥미를 느낀 소년은 눈가에 적힌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조르고, 소녀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렇게해서 <천일야화>처럼 기나긴 이야기가 시작된다. 소년은 밤마다 궁을 빠져나와 소녀가 사는 곳을 찾아오고, 소녀는 끝없이 계속될 것 같은 이야기를 이어간다. 이야기 속에서 한 왕자가 모험을 찾아서 길을 떠나고 마녀를 만난다. 그 마녀는 자신의 할머니가 어떻게 자신에게 마법을 가르쳤는지 왕자에게 들려준다. 또 그 할머니는 자신이 어떻게 동굴의 시험을 이겨냈는지를 마녀에게 들려준다.

소녀의 눈꺼풀에 씌여있는 수많은 이야기

이런 식으로 사람과 괴물들에게 얽힌 사연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인형 안에 또다른 인형이 들어 있는 마뜨로쉬까 인형처럼 이야기 안에 다른 이야기, 그 이야기 안에 또다른 이야기가 들어있는 것이다. 하긴 인간이건 괴물이건 사연이 없는 존재는 없을 터이니, 그들의 사연을 모두 챙겨 듣다보면 이런 구성이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등장인물들의 이야기가 중구난방으로 펼쳐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이들의 과거와 행적이 교묘하게 서로 얽히면서 갈등이 하나씩 해결된다. 소녀가 풀어놓는 이야기 자체도 흥미롭지만 그보다는 소녀의 운명에 더욱 관심이 생긴다. 이야기를 모두 들려주고 나면 악마로 취급받는 소녀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소녀의 이야기 속에는 거구의 중년 여성이 한 명 나온다. 자신이 옛부터 전해져오는 예언 속의 소녀일거라고 믿었지만, 세월이 흐른 후에야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여성이다. 그녀는 항구도시의 부두에서 어부들의 그물을 짜다가 술 기운에 잠드는 삶에 안주하고 만다.

정원의 소녀도 자신이 전설과 동화 속의 주인공이 될 거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지금이야 술탄의 정원에서 거지처럼 살고 있지만, 때가 되면 자신이 예언 속의 영웅이 될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래야 변함 없이 지루한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을 테니까. 어쩌면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 한 구석에도 그런 바람이 남아 있을지 모른다.

덧붙이는 글 | <소녀와 비밀의 책> 1, 2. 캐서린 밸런트 지음 / 변용란 옮김. 노블마인 펴냄.


덧붙이는 글 <소녀와 비밀의 책> 1, 2. 캐서린 밸런트 지음 / 변용란 옮김. 노블마인 펴냄.
#소녀와 비밀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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