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쾡이, 일본 본토엔 없고 대마도에만 있는 이유

[대마도, 우리 땅이 아니었네 ②] 이즈하라 둘러보기 2

등록 2011.08.18 14:19수정 2011.08.18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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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 이야기

 고려문
고려문이상기

고려문 가는 길에는 성벽이 있다. 이즈하라에는 청수산성이라 불리는 외성이 있고, 금석성이라 불리는 내성이 있었다. 금석성의 성벽은 현재 대부분 훼손되었으나, 고려문에서 체육관으로 이어지는 길가로 성벽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고려문은 금석성(가네이시죠: 金石城) 성안에 있던 대마도주의 거처인 사지키바라(棧原)의 정문이었다. 원래 이름은 영은문이었으나, 에도시대 조선통신사가 이 문을 통해 들어오면서 고려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문은 1987년 태풍으로 무너졌고, 1989년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고려문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에 성신지교린(誠信之交隣)이라 쓴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 1668-1755) 현창비가 있다. 여기서 성신지교린이라 '진정으로 믿음을 갖고 이웃끼리 교류한다'는 뜻이다. 조선통신사를 통해 조선과 일본이 교류하면서 만들어진 일종의 어젠다였다. 이 어젠다를 가장 잘 실천한 사람이 아메노모리 호슈였고, 그 때문에 아메노모리 호슈 현창비라는 부제가 붙었다. 1990년 8월 호슈를 기리는 모임인 호슈회에서 세웠다.

 조선통신사비
조선통신사비이상기

고려문 왼쪽에는 다른 비석이 또 하나 서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세운 조선국통신사지비다. 1992년 2월 세웠고, 재산 최세화 박사가 글씨를 썼다. 그 옆에는 에도시대의 조선통신사라는 오석이 있으며, 통신사의 역사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그 비석에 의하면, 조선통신사는 외교사절이자 문화사절이었다. 그들은 동아시아 국제사회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대마 역사민속자료관

이들을 보고 나면 자연스럽게 대마 역사민속자료관으로 향하게 된다. 이 자료관은 대마도에서 가장 큰 박물관으로 고고학적 발굴유산, 문화재, 민속자료, 종가 문서 등을 보관하고 있다. 1978년 12월에 개관하였으며, 2층으로 되어 있다. 1층이 상설전시실이고, 2층이 특별전시실이다.

 살쾡이
살쾡이이상기

상설전시실 입구에는 천연기념물인 대마도 살쾡이 박제가 놓여 있다. 살쾡이는 일본 본토에는 없고 오로지 대마도에만 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대마도는 지질학적으로 한반도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수 만 또는 수십 만 년 전 한반도에서 떨어져 나온 섬이기 때문이다. 대마도의 새는 고려 꿩인데, 이것 역시 한반도와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전시관 안으로 들어가면 이 지역에서 발굴된 토기와 청동기, 철기 등이 보인다. 토기로는 융기문 토기, 무문토기, 즐문토기 등이 있다. 융기문 토기는 8000년 전의 것이고, 즐문토기는 약 6000~5000년 전의 것으로 여겨진다. 청동기로는 세형동검과 동경 등이 있는데, 한반도의 것과 같은 양식이다. 또 이곳에 전시된 청자와 불상 그리고 대장경 역시 한반도에서 전래된 것이다. 이러한 유물을 통해 대마도가 한반도 문화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즐문토기
즐문토기이상기

이곳에는 또한 대마도 사람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복식과 생활용품이 전시되어 있고, 그들의 생활상을 그린 그림을 전시해 놓았다. 옷은 우리의 개량한복처럼 느슨하고 편하게 만들어졌다. 그림을 보니 대마도 사람들은 바다를 대상으로 삶을 영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대마도에는 농토가 적어 농사를 주업으로 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남자들은 그물을 놓아 고기를 잡고, 여자들은 해녀가 되었으며, 이도 저도 안 되는 사람들은 해조류를 채취해 살았다.


이곳에서 본 특별한 것은 대마도주인 종가(宗家)의 인장이다. 이는 일종의 관인으로 외교문서, 도항증명서 등에 날인되었다. 특히 문인(文引)제도가 시행된 1438년부터 조선으로 가는 모든 배는 종가의 도항증명서을 받아야 했다. 문인 발행의 독점권을 종가에서 얻음으로 인해, 그는 정치적인 권력과 경제력을 겸비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그는 한·일 교류의 중간자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종가의 인장
종가의 인장이상기

조선통신사 관련 자료로는 두루마리 형태로 된 조선통신사 행렬도가 있다. 폭이 27㎝, 길이가 16.58m나 되는 대형 채색 두루마리 그림이다. 이곳에는 청도(淸道)라는 깃발을 걸고 말과 가마를 타고 가는 정사(正使)와 군환(軍宦)들의 모습이 보인다. 정사란 통신사를 대표하는 사신이라는 뜻이고, 군환은 호위를 책임지는 무인이라는 뜻이다. 이들 호위무사들은 긴 칼을 들고 활을 찼다.

조선통신사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사람이 있다. 그가 아메노모리 호슈다. 그는 시가현(滋賀縣) 사람이었으나 1693년 대마도로 건너가 종가의 행정보좌역으로 일했다. 더욱이 조선방 어용지배좌역을 맡으면서 조선과의 관계를 책임지는 인물로 부각되었다. 그가 맡은 일은 조선의 동래부로 보내는 문서 작성, 대조선 무역 업무 수행, 역관의 접대와 양성 등이었다.

 아메노모리 호슈
아메노모리 호슈이상기

이곳 자료관에는 아메노모리 호슈의 초상과 시 한 편이 걸려 있다. 이들은 모두 복사본이지만, 그의 얼굴과 그의 글을 대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초상화 위에 보니 '공이망사 국이망가(公爾忘私國爾忘家)'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공을 위해 사를 잊고, 나라를 위해 가정을 잊는다는 뜻이다. 공과 나라를 우선시하는 그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초상화 옆에 걸린 시에서도 아메노모리 호슈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지만, 10년간 만나지 못한 친구를 그리는 애틋한 심정이 들어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어차피 만나지 못할 바엔 그 친구를 잊기 위해 바쁘게 살 것을 다짐한다. 이 시가 여기에 걸린 이유를 알고 싶다.

 아메노모리 호슈의 시
아메노모리 호슈의 시이상기

봉황이 고래와 함께 바다에 살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면서 鳳京與鯨海
10년간 만나지 못함을 추억하더라.                               追憶十年離
꿈에라도 말 타고 왕래하기를 두려워하면서도                馳夢往來怯
편지를 받으면 안부를 걱정하더라.                               得言安否疑
서로 만나면 누구라도 기쁘지 않으랴만                         遭逢雖固喜
거동할 때마다 슬픔이 가득하더라.                               擧動奈全哀
시간이 남으면 오히려 미칠 것 같으니                           惟剩狂奴態
편안함을 멀리하며 옛날처럼 살리라.                            休嫌似舊時

금석성과 덕혜옹주

 금석성 노문
금석성 노문이상기

역사민속자료관을 나와 하천변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반쇼인(万松院) 방향으로 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노문(櫓門)이 하나 나타난다. 이것은 금석성의 외문 겸 망루로 1919년 도로를 내기 위해 해체되었다. 그 후 문화유산 복원 차원에서 1990년 재건되었다. 이 노문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수영장이 있고, 앞으로는 정원 형태의 공원이 펼쳐진다. 이곳이 옛날 금석성 정원이었다.

여기에는 덕혜옹주 결혼을 축하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덕혜옹주는 고종의 딸로 1931년 5월 종무지(宗武志)와 결혼해, 이후 도쿄에 살았다. 둘 사이에는 딸 정혜가 있었으나 1953년 정신적인 갈등으로 인해 합의 이혼하였다. 덕혜옹주는 그 후 얼마 동안 일본에 살다가 1962년 귀국하여 낙선재에서 살았으며, 1989년 세상을 떠났다.

현재 정원의 뒤쪽 산자락에는 체육관이 있다. 그러므로 정원지역은 체육관과 수영장 등 이즈하라 사람들의 운동과 휴양시설로 활용되고 있다. 이곳은 또 조선통신사들이 올 때마다 거쳐 가던 곳으로 '조선통신사 막부 접우지지'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이즈하라는 조선통신사를 빼놓으면 할 얘기가 없다.   

서산사와 국분사

 이테이안
이테이안이상기

이제 조선통신사와 관련이 있는 서산사로 찾아갈 차례다. 서산사는 1590년 일본에 통신사로 갔던 황윤길, 김성일, 허성 일행이 들렀던 곳이다. 그 당시 글씨를 잘 썼던 이해룡이 만송산(萬松山)이라는 편액을 써주었다고 한다. 서산사는 조선과 일본의 중개역할을 했던 현소 스님이 주석하던 곳으로, 1611년에는 대 조선 외교실무를 담당하는 기관인 이테이안(以酊庵)이 세워졌다. 이때부터 조선통신사 업무를 취급하는 가장 중요한 절이 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조선통신부사였던 학봉 김성일 선생 시비가 세워져 있다.

 서산선사 돌정원
서산선사 돌정원이상기

서산사의 현재 이름은 학익산(鶴翼山) 서산선사(西山禪寺)다. 이름에서 선종계열의 절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절 앞에 돌정원이 잘 가꾸어져 있다. 바위 형태의 돌을 가운데 세우고, 그 주변에 굵은 모래를 깐 다음 갈퀴질을 해 물결 모양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작은 바위는 산을 상징하고, 굵은 모래는 물을 상징한다. 이처럼 선은 대상에 대한 주관적 해석을 통해 마음 속으로부터 깨달음을 얻어가는 것이다. 이곳 서산사에서는 이즈하라 항구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국분사(國分寺)는 서산사와는 다른 쪽 언덕에 있다. 조선통신사의 글 속에 보면 복리산(福利山) 국분사로 나와 있다. 국분사는 대마도주가 조선통신사를 초대해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1590년 국분사에 초대받은 통신사 부사 김성일은 대마도주의 무례함을 꾸짖고 그의 사과를 받아내기도 했다. 나중에 국분사에는 객관이 마련되어 조선통신사 일행이 묵는 숙소가 되기도 했다.

 국분사
국분사이상기

현재의 절은 1807년 재건된 것으로 시 지정 유형문화재다. 현재 정문은 수리중이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넓은 터에 자리 잡은 아주 큰 절이다. 대마도주의 원찰로 종가의 중요한 행사를 이곳에서 거행했다. 절 안에는 종루가 있고, 그 안으로 여러 개의 전각이 있다. 그리고 이들 전각 뒤로 큰 객관이 있다. 이것이 주로 통신사 하급관리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절 뒤 산자락에는 묘지가 아주 크게 조성되어 있다. 현재 일본의 절들은 이처럼 죽은 자들을 위한 공간으로 변해 가고 있다.
#조선통신사 #아메노모리 호슈 #대마 역사민속자료관 #금석성과 덕혜옹주 #서산사와 국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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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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