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제주까지...100개의 지평선을 건너가라

'1번 국도' 따라 임진각에서 강정마을까지... 작가들의 '글발글발평화릴레이'

등록 2012.01.07 11:16수정 2012.01.07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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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글발글발평화릴레이

글발글발평화릴레이 ⓒ 김태형


대략적인 산술이지만 내 눈에 보이는 지평선은 5㎞쯤 될 것이다. 경기도 파주 임진각에서 제주 강정마을까지 527㎞를 50개 구간으로 나누어 작가들이 걷는다고 하니 지평선을 100번쯤 넘어야 하는 광막한 거리다.

눈이 녹아 얼어붙은 길을, 인도마저 군데군데 끊긴 아스팔트 도로를 작가들이 선뜻 나서서 "1번 국도 따라 임진각에서 강정까지 생명평화 걷기"에 함께하고 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그 속도로 천천히 이 땅 위를 걸어 돌 하나 들꽃 하나가 그저 바람과 햇빛과 파도소리에만 흔들리고 피어나고 가득하기를 바라면서 걷고 있다.

우리 일행은 이른 아침부터 훈련비행 중인 전투기 폭음을 들으며 경기도 수원 세류동에서 모였다. 정한용, 박형준 시인, 그리고 등단한 지 갓 1년 된 박송이 시인 등이 용인에서 서울 북가좌동에서 대전에서 안산에서 오셨다. 운동회 말고는 달리 구호를 외쳐본 적이 없을 것 같은 조용한 시인들이 시린 주먹을 몇 번 치켜들고 '평화'를 선포까지 하면서 걷기 시작했다.

전시에 비행기 활주로로 사용하기 위해 가로수마저 심지 않은 도로는 가속으로 질주하는 차량들에 의해 그 황량함이 감추어져 있었다. 그나마 차량의 속도가 느린 1번 국도 옛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지만 좀체 사람이 걸을 수 있는 길은 아니었다. 이 비좁은 길에도 10톤 트럭이 건설 폐기물 등을 가득 싣고 바삐 지나가고 있었다. 걸어갈 만한 공간도 없는데 시인들은 길 밖으로 자꾸만 떠밀리고 있었다.

어깨에 멘 우편 가방에는 강정마을에 보내는 작가들의 편지가 담겨 있고, 왼쪽 손에는 현수막이 들려 있었다. "돌멩이 하나 꽃 한 송이도 건드리지 마라!" 도심으로 들어서면서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시민들 앞으로 지나갔다. 몇 사람이 힐끗 우리가 들고 있는 현수막을 보다가 이내 버스가 내달려올 도로를 향해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강정마을에 보내는 편지 가방을 메고... 지평선을 건넌다

a  김태형 시인

김태형 시인 ⓒ 김태형

"뭔가 메시지가 약해! 커다랗고 붉은 글씨로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반대!' 뭐 이 정도는 씌어 있어야 되는 거 아니야?"


누구랄 것도 없이 우리는 그런 심정이었다. 어딘가 문장이 너무나 모호하고 아름답다. 간혹 시인들이 지나치게 미학에 기대면서 현실로부터 동떨어진 세태도 이런 느낌을 부추기는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문학의 정치성을 미학으로 넘어가려는 것은 한편 위태로워 보인다.

그러나 곧 내가 지금 왜 걷고 있는지 되돌아보자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누구였더라, 내 삶이 그 자체로 나의 메시지라고 했던 이는. 허황한 수사와 목소리만 큰 주장에 기댈 것이 아니라 내 삶이 그대로 메시지가 되어야 할 텐데. 그 메시지가 뜨거운 문장이 되거나 한 줄의 시가 되어 굳이 '평화'를 선포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맞이해야 할 텐데. 나는, 아니 우리는 이렇게 지평선 하나를 건너가고 있었다.


길을 나서는 새벽까지 지난여름에 쓰다 밀어둔 <지평선>이라는 시를 꺼내 "어느 곳으로든 나는 지극히 멀다"는 시구를 하나 겨우 남겨 두었다. 나에게서 가장 먼 곳을 본다는 것은 그 끝에서 내가 무엇과 맞닿아 있는지 깨닫게 한다. 아득하다는 말은 그곳에 이미 내가 머물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될 것이다. 지평선을 건널 수 있는 것은 저 너머에 나를 기다리는 이가 있기 때문이다. 지평선은 그렇게 건너가는 것이다. 그이도 또 다른 지평선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갈 것이다.

나는 몇 년간 시인들의 목소리를 녹음하고 이 세상 먼 곳까지 매주 시를 배달하고 있다. 이번에는 85호 크레인에서 내려온 김진숙 선생이, 희망버스를 기획해서 구속된 송경동 시인의 시를 직접 녹음해서 보내주기로 했다. 이 목소리가 곧 또 다른 지평선을 건너갈 것이다. 이렇게 지평선이 내 앞으로 서서히 밀려오고 있다. 100개의 지평선은 혼자서 건너가는 것이 아니다. 강정마을의 돌멩이 하나 들꽃 한 송이도 이제 혼자가 아니다. 아득하다.

덧붙이는 글 | 김태형 시인 :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92년 <현대시세계>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로큰롤 헤븐> <히말라야시다는 저의 괴로움과 마주한다> <코끼리 주파수>가 있다.


덧붙이는 글 김태형 시인 :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92년 <현대시세계>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로큰롤 헤븐> <히말라야시다는 저의 괴로움과 마주한다> <코끼리 주파수>가 있다.
#강정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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