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부와 통장 그리고 각종 생활비 영수증
최유진
해마다 1월이 되면 사람들이 결심하는 것 중 하나가 가계부 쓰기다. 특히 요즘 같은 고물가 시대, 비어가는 통장잔고와 늘어나는 마이너스 통장 잔액을 쳐다보며 "그래 올해는 가계부 꼭 써봐야 겠다"고 다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가계부를 쓰면 무엇이 좋을까? 일단 돈 씀씀이를 기록하면, 평상시 지출을 긴장하게 만들어 저절로 소비가 줄어드는 효과를 낸다. 어디에 얼마를 언제 쓰는지 알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돈 모으기를 계획하게 되어 빚을 발생시킬 가능성도 줄어든다.
남편 또는 아내에게 내가 얼마나 알뜰하게 살림을 하고 있는지 자랑할 수도 있을 것이요, 아이들에게는 돈 관리 잘하는 경제선생님이 될 것이다. 이렇게 가계부를 쓰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효과는 크고 다양하다.
그러나 이걸 몰라서 가계부 못 쓰는 건 아니다. 게으름과 귀차니즘은 가계부를 멀리하게 만드는 단골 핑계다. 또 써보니, 마이너스 가계부라 들여다 보면 화나서 포기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혹은 신용카드 청구서만 봐도 돈 씀씀이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렇듯 가계부를 안 쓰는 이유도 쓰는 이유만큼 많다. 주변에 가계부를 쓰는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없다는 것만 봐도 꾸준히 가계부를 쓴다는 것은 어려운 일임에는 틀림없다.
특히 가계부를 돈을 절약하는 수단으로만 본다면 가계부 쓰기는 어렵다, 아니 고통스럽다. 돈을 아꼈을 때, 소비의 유혹을 참았을 때는 기쁘고 그런 내가 대견하다. 반대로 돈을 허투로 썼다는 생각이 들면 자괴감이 들고 불편하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소비의 유혹이 워낙 강력하기 때문에 가계부를 쓰다보면 대견하기보다는 불편한 감정이 훨씬 더 많이 생길 수밖에 없다.
돈을 절약하기 위해서만 가계부를 쓰면, 나는 소비 유혹에 잘 넘어가는 사람,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반복적으로 든다. 점점 더 가계부 쓰는 것이 싫어지게 된다. 이렇게 의지 박약한 나를 가계부를 통해 자꾸 확인할 바에야 차라리 가계부를 덮고 속 편히 살자, 라는 결론에 스스로 이르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대다수 사람들에게 발생하는 자연스런 현상이자 반응이다. 돈을 절약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가계부는 이렇게 지속되기 어려운데, 이는 당연한 일이다.
가계부는 당신에게 말을 한다 가계부가 숫자만 빼곡히 적힌 노트에 불과하다면 가계부 쓰는 것은 재미없다. 그러나 가계부를 쓰는 사람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가계부의 숫자들은 당신에게 끊임없이 말을 하고 있다. 그것도 당신이 가장 궁금해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던져주고 있다. 바로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이다.
어떻게 가계부가 나를 보여줄까? 가계부는 돈에 대한 기록이다. 그리고 돈을 쓸 때 사람들은 당연히 자기 마음이 가는 곳에 돈을 쓸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이번 달 스키장 가는 횟수를 줄이고 그 돈을 저축하는 것이 이성적으로는 맞는 판단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 마음 가는 곳이 스키장이라면 아마도 거기에 돈을 쓸 것이다.
지출에서 사교육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다면 나는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는 것이 우리 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부모님이나 경조사에 들어가는 돈이 많다면 사람 노릇하며 사는 것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인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저축을 포기하고 스키장을 선택한 것이 과연 잘못인가 하는 점이다. 내가 마음이 가는 곳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 내가 행복한 것이다. 무조건 아껴 쓰는 것만이 올바른 가치라고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돈 쓰기의 가치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스키를 타는 취미활동이 나의 행복을 증진시키고 내 삶을 풍요롭게 한다면, 마땅히 거기에 돈을 써야 한다. 행복은 적금처럼 은행에 맡겨놓았다가 나중에 한꺼번에 찾아 쓸 수 있는 그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내가 누리고 싶은 행복도 미래의 행복만큼 중요하다.
행복하기 위해 쓰는 돈은 몇 퍼센트 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