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이 오면 좀비와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리뷰] 아이작 마리온 <웜 바디스>

등록 2012.01.20 11:36수정 2012.01.20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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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웜 바디스> 겉표지
<웜 바디스>겉표지황금가지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겠지만, 혹시라도 평소에 좀비를 만나면 아무 말없이 도망가는 것이 상책이다. '저리 꺼져'라던가 '다가오면 죽인다'라는 식의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좀비 서바이벌 가이드>의 저자이자 좀비 전문가인 맥스 브룩스의 표현에 의하면, '일반적인 좀비의 사고능력은 곤충보다 낮은 수준'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의식도 기억도 없고 의사소통 능력도 없다. 쉽게 말해서 좀비는 '아무 생각이 없는 존재'인 것이다.

만일 좀비에게도 의식과 사고력이 있고 간단한 의사소통 능력이 있다면 어떨까. 그러면 좀비와 인간 사이의 끝도 없는 살육전을 멈출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이작 마리온의 2011년 작품 <웜 바디스>에는 '사고력을 가진 좀비'가 등장한다. 물론 작품 속에서 이런 좀비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웜 바디스>의 무대는 미래의 미국이다. 세상은 폐허로 변해버렸고 좀비와 인간으로 나뉘어서 서로 으르렁거린다. 무엇 때문에 세상이 몰락했는지는 알 수 없다. 전염병이 번졌는지 핵전쟁이 터졌는지, 아니면 세계대공황 같은 초유의 사태가 생겼는지 정확히 모른다. 하긴 세상의 끝에 다다랐다면, 어떤 경로로 거기에 도달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한 소녀의 생명을 구한 좀비

살아남은 인간들은 대부분 스타디움 같은 폐쇄된 장소에 모여서 엄중하게 사방을 경계하며 공동생활을 하고 있다. 좀비들은 공항에 모여서 산다. 인간들은 나름대로 경작을 하며 남아있는 냉동식품 등을 소비하면서 살아간다. 좀비는 인간을 먹어야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니 좀비와 인간의 대립은 필연적인 것이다.


자신의 이름은 'R'이라고 막연히 생각하는 한 좀비가 있다. 그는 다른 좀비들과 함께 사냥에 나섰다가 건물에 모여있는 인간들을 발견한다. 곧 싸움이 벌어지고 R은 한 소년에게 달려들어서 그의 목덜미를 물어 뜯는다. 그와 동시에 그 소년의 생전 기억이 파도처럼 R을 덮친다.

그 기억 안에는 소년의 여자친구인 줄리의 모습도 있다. 다시 현실로 돌아온 R의 앞에는 공포에 질린 채 비명을 지르는 줄리가 있다. R은 줄리를 지켜야 한다고 다짐한 듯이 다른 좀비들이 인육을 먹는 동안 줄리의 손을 잡고 그 건물을 빠져나온다.


이때부터 좀비와 소녀는 공항 한쪽에서 함께 살아가기 시작한다. R은 다른 좀비들이 줄리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주면서, 냉동식품과 미지근한 맥주 등을 가져다준다. R은 생전의 모든 기억을 잃었지만 사고력도 있고 가벼운 언어구사능력도 있다. 줄리는 멍청하지만 착하고 충실한 R과 대화를 하면서 조금씩 마음을 열어간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R과 줄리가 서로 믿는다 하더라도, 좀비와 인간은 어차피 함께 살아갈 수 없다. 좀비는 인간을 발견하면 먹으려고 하고, 인간은 살아있는 모든 좀비를 죽여 없애려고 한다. 그런 구도 안에서 R과 줄리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좀비와 소통하려 노력하는 사람들

좀비가 등장하는 소설들은 많다.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 스티븐 킹의 <셀> 모두 그런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과 <웜 바디스>의 차이점은 좀비를 바라보는 시선에 있을 것이다. R처럼 '각성한 좀비'들은 나름대로 의식적인 생각을 하면서 인간을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한다.

줄리와 그녀의 친구 노라는 이런 R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함께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여기서도 소통의 문제가 발생한다. 기성세대들은 줄리와 노라의 방식을 인정하지 않는다. 기성세대들은 줄리에게 '이 세상은 끝났다,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어'라고 말한다.

줄리는 '우리는 이기적이었고 겁쟁이였다고요'라고 반박한다. 좀비들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일반적인 좀비들이 보기에 R은 좀비집단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배신자이다. 역병 속의 또다른 역병 같은 존재인 것이다.

줄리와 R은 그래도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노력한다. 폐허로 변한 좀비 천지의 세상이지만 그 안에서 작은 희망이라도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럴 가능성은 정말로 희박하겠지만, 혹시라도 좀비를 만나면 도망치지말고 그의 눈동자를 유심히 들여다보자. 각성한 좀비라면 그 안에서 한줄기 빛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희미하더라도 소통의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웜 바디스> 아이작 마리온 지음 / 박효정 옮김. 황금가지 펴냄.


덧붙이는 글 <웜 바디스> 아이작 마리온 지음 / 박효정 옮김. 황금가지 펴냄.

웜 바디스

아이작 마리온 지음, 박효정 옮김,
황금가지, 2011


#웜 바디스 #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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