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와집몰랑을 거쳐 보로봉의 365계단을 내려오니 찻길과 만났다. 찻길이라고 해봐야 승용차 한 대 겨우 지날 정도의 폭이다. 그것도 잠시, 찻길은 이내 끊겨 버렸다. '목넘어'라는 암초가 있어서다. '목넘어'는 보로봉과 수월산을 이어주는 잘록한 허리 모양의 길목이다. 거대한 암반인 목넘어는 태풍이나 해일이 있을 때 바닷물이 넘나든다 하여 '목넘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예전 예능프로그램인 <1박 2일>에서 이 '목넘어'가 소개된 적이 있다. 거문도를 찾은 <1박 2일> 팀이 이곳에 이르러 찻길이 끊기자 차에서 짐을 전부 내린 후 등대까지 걸어가게 된다. 사실 등대 가는 길은 비교적 잘 닦여져 있어 가볍게 산책을 하기에 적당한 길인데 '목넘어'는 암반으로 되어 있다 보니 화면으로 보면 조금은 거친 길로 보였을 것이다.
게다가 무게가 나가는 각종 방송장비를 일일이 사람의 힘으로만 옮겨야 했으니 만만치 않은 길이었을 것이다. 당시 방송에서는 그 고된(?) 과정을 '거문도의 차마고도'라 표현했다. 언론에서는 이 장면을 '예능고도"라 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곳에 오면 '차마고도'라는 표현이 예능의 재미를 위해 과장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그로 인해 이곳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보는 재미도 있다.
해질녘이 다 되어서인지 등대로 가는 사람은 없었다. 울퉁불퉁한 암반 '목넘어'를 지나자 곧바로 숲길이다. 여기서부터 등대까지는 동백이 터널을 이루고 있는 긴 숲길이다. 길 위에는 붉은 동백이 뚝뚝 떨어져 있다. 누군가의 말대로라면 동백이 붉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마침 등대에서 내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등대에 근무하는 사람인지 어깨에 커다란 상자를 둘러메고 부지런히 걸어오고 있었다. 차가 다닐 수 없는 길이라 선착장으로 가서 배를 타든지, 아니면 '목넘어'를 지나 시작되는 찻길로 가서 차를 타야 할 것이다. 요즈음 보기 드문 풍경에 <1박 2일>의 '차마고도'라는 말이 절묘하게 어울린다는 걸 새삼 느꼈다.
등대 가는 길은 중간 중간 전망대를 두어 주변 풍광을 감상할 수 있게 하였다. 전망대 아래로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바위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생긴 모양대로 이름이 선바위다. 선바위는 위에서 보면 검푸른 천 위에 노인이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하여 '노인암'으로도 불린다.
숲길 따라 이곳저곳 볼거리가 많다. 바위를 타고 자라는 송악도 보이고 이곳의 동식물에 대한 안내문도 더러 보인다. 새소리 바람소리에 나도 모르게 아까 안내문에서 본 '거문도 뱃노래' 한 자락을 흥얼거려 본다.
(선)어랑성 가래야 (후)어랑성 가래야
(선)이 가래가 뉘 가랜고 (후)어랑성 가래야
(선)우리 배에 가래로다 (후)어랑성 가래야
(선)여그도 실고 고물도 실어보세 (후)어랑성 가래야
거문도 뱃노래 중 고기를 퍼내면서 부르는 가래소리다. 전남지방 무형문화재 1호로 지정된 '거문도 뱃노래'는 어부들이 고기를 잡으며 부르는 노동요이다. 고기 잡는 과정에 따라 여러 소리가 있는데 고사소리, 술비소리, 놋소리, 월래소리, 가래소리, 썰소리가 있다.
음을 모르면서도 제 흥에 겨워 미친놈처럼 어깨를 들썩이다 보니 어느새 눈앞에 등대가 나타났다. 옛 등대 대신 2006년에 세운 33m 높이의 거대한 등탑이 바다 위로 불쑥 솟아 있었다. 1905년 4월에 세워진 옛 거문대 등대는 팔미도 등대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번째, 남해안 최초의 등대이다. 일몰과 일출이 아름다운 등대는 사전에 예약하면 숙박도 가능하다.
등대 옆을 돌아가니 관백정이 있다. 거문도의 자랑, 백도를 볼 수 있다는 뜻인데 이곳에 서면 삼면으로 탁 트인 풍경이 일품이다. 오늘은 날씨가 흐려 황홀한 일몰도, 아름다운 백도도 볼 수 없었다. 대신 삼부도만이 어렴풋이 윤곽을 드러냈을 뿐이다.
해가 지기를 기다렸으나 끝내 일몰은 볼 수 없었다. 주위는 이미 어두워졌고 여행자는 서둘러야 했다. 거문항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밤중이었다. 민박집 주인이 자연산 광어회를 추천하여 소주를 곁들이며 혼자 먹었다. 얼큰하게 취해 잠시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왔는데 뱃전을 훤히 밝힌 배들이 난데없이 포구로 모여들었다. 삼치를 그득 실은 배였다. 카메라를 들고 뛰었다.
☞ 여행팁 거문항에서 등대까지는 4km 남짓으로, 걸어서 왕복 1시간 30분~2시간 정도 소요된다. 기와집몰랑 산길로 가면 2시간~2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유람선을 이용하거나 택시를 이용해서 갈 수도 있으나 '목넘어' 일대에서 내려 등대까지는 얼마간 걸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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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미식가이자 인문여행자. 여행 에세이 <지리산 암자 기행>, <남도여행법>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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