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은 육체다

[서평] <은교>... 은교에는 은교가 없다

등록 2012.05.14 10:25수정 2012.05.14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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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은교> 표지
소설<은교> 표지문학동네
소설 <은교>의 가장 큰 성취는 인간 삶의 육체성 즉, 실존의 육체성을 확인한 성찰이다. 문단의 존경을 받는 시인 '이적요'는 등단 한 뒤에 스캔들 하나 없이 근엄하게 시만 쓰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살았다.

그가 얻은 세속의 평판은 사실 그가 계획한 전략의 성과였다. 사회와 지식인 그리고 문단과 평단의 행태와 작동원리를 잘 파악하고 있던 그가 그들이 그렇게 평가하게끔 그물을 쳐서 건져 올린 것이다. 그만큼 일흔의 늙은 시인의 삶은 철두철미했다. 그런 그에게 섹스는 돈으로 사거나 주위에서 취할 수 있으면 그냥 해결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것에 사랑은 없었다.


실존의 육체성을 성찰하다

그러나 은교의 등장으로 그의 삶은, 가치관은 뿌리째 흔들린다. 파란 핏줄이 도는 은교의 하얀 손, 생명의 꿈틀댐을 보는 순간 사랑에 빠져든다. 그녀를 그리워하고, 저돌적으로 멈출 수 없이 그녀 몸에 손이 가며, 섹스의 욕망까지 치솟는다. 늙은 육체로 마음까지 늙어갔던 그에게 푸른 젊음이 주는 생동의 탄력에 마음을 빼앗긴다. 그가 시적 천재성이라고 말하는 신성(神性)은 사랑 앞에 발기한 육체에 무너져 내렸다.

그래서 그는 고백한다. "내 몸 안에도 얼마나 생생한 더운 피가 흐르고 있었는지를 알았고, 네가 일깨워준 감각의 예민한 촉수들이야 말로 내가 썼던 수많은 시편들 보다 훨씬 더 신성에 가깝다는 것을 알았고, 내가 세상이라고, 시대라고, 역사라고 불렀던 것들이 사실은 직관의 감옥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는 말한다. "때로는 신성, 때로는 불멸이 내가 흔드는 깃발에 표시되기도 했다. 하지만,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껍데기 다 날려버리고 남는 것, 내가 온갖 불온한 시대를 살아오면서 진실로 그리워한 것은, '처녀'의 '숨결'이었다는 것이다. 네 숨결에 비하면, 내가 내걸었는 명분의 기치는 모두 '마지못한' 것에 불과했다"고.

그동안 우리사회는 늙음이라는 것 때문에 노인의 사랑을 거세해왔다. 이성과 사랑을 나누고, 육체를 즐기는 것은 젊은이들의 전유물로 인식했다. 노인의 사랑에 대한 이끌림은 영화 <은교>에 대한 많은 리뷰에서도 드러나듯이 '노욕'같은 것으로 치부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 노인들이 구애하는 모습을 잘 볼 수 없었다. 그들을 그냥 세월 따라 소일이나 하며 쭈그러져 가며 죽어가는 사람인 것처럼 생각했다. 소설은 이적요를 통해 나이 든 사람의 사랑에 대한 열정, 육체에 대한 갈망도 자연스러운 것임을 묘사하여 노인도 젊은이와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속 은교
영화속 은교정지우필름

자본주의 사회의 일그러진 사랑


소설은 우리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만들어지는 일그러진 사랑을 펼쳐간다. 서지우는 상대적으로 강압적이고 까칠하게 은교를 다루고, 이적요는 부드럽고 조심스럽지만 은교에 대한 갈망은 같다. 17살 고등학생 소녀를 사이에 둔 사랑 또는 욕망의 충돌은 질투를 만들어내며 애증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든다. 죽음도 불사하는 대립으로 이끈다.  

서지우의 사랑은 사회의 기준에서 실패한 인생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는 이혼의 경력과 수준 낮은 문장력을 가진 이력에서 맛보는 소외 때문에 때로 은교를 강압하는 욕망해소로 나타나지만, 육체의 허함과 마음의 허함을 위로받기 위해 은교를 갈망한다.


또 스승과 공모(共謀)로 작품을 출품하여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지만 사실이 드러날까 안절부절 못하는 불안감과 출판사로부터 새로운 원고 청탁에 스승의 원고를 훔치는 죄책감을 달래고자 은교를 갈망한다. 그의 사랑은 소외감과 '탐욕이 낳은 부정에서 만들어진 불안함'의 피난처이다. 그래서 자본주의에 존재하는 한국사회에 존재하는 '욕망'으로 덧칠 될 수밖에 없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처럼 기형의 모습을 하고 있다. "선생님 집에 가려면 그애의 학교, 그애의 집 앞을 지나야 하기 때문에 그때마다 보고싶어 더 애가 탔다"는 진심이 있었지만 말이다.  

이적요의 사랑은 젊은이에 대한 노인의 사랑을 터부시하는, 노인은 사랑이 없는 존재로 인식하는 사회에 대한 저항이라는 긍정성이 있지만, 사회에 대한 저항은 사회의 낡은 관념을 인격화하고 있는 서지우에게 질투와 경쟁의 모습을 띠면서 욕망의 대결이 된다. 그 속에서 서지우의 사랑은 폭력 같은 것으로 재단하고 자신의 사랑은 숭고한 것으로 감싸는 모습은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질투와 시기, 경쟁에서 만들어내는 판단 행태를 잘 보여준다. "아름다움에 대한 충만한 경배가 놀라운 관능일 수 있으며, 존재 자체에 대한 뜨거운 연민이 삽입의 순간보다 더 황홀한 오르가슴일 수 있다는 것을 그가 어찌 꿈엔들 상상할 수 있으랴"며 말하면서 말이다.  

작가는 세속의 명예와 성공이 얼마나 허구인가를 보여주며 세상을 조롱한다. 스승의 소설로 문학상을 거머쥐는 문단의 예는 대한민국의 부패를 상징화 한 것이다. 또 세속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이해관계자들이 고민하는 모습 즉, 이적요가 죽고 난 뒤 그가 쓴 글을 공개할지 말지 고민하는 변호사와 문단 관계자들의 모습들에서 세속의 거짓된 명예가 어떻게 보호되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이와 함께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에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것은 혈연에 따른 의무와 권리로 사람의 관계를 묶어두려는 일종의 정치적인 속임수, 라고 까지, 생각했다. 가족도 마찬가지였다."라고 말하는 이적요를 통해 세상에 존재하는 제도의 허구성도 보여주려 노력한 것 같다.

은교를 읽는 동안 내 온 힘이 소설 속에 빨려드는 듯 했다. 경쾌하고 간결한 문체, 자연과 사물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 '내밀한 욕망'에 대한 탐구가 그렇게 만들었다.

세상은 심미(審美)할 수는 있으나, 절대 아름답지 않은 세상 그대로의 객관성, 그 이중성을 인물들의 심리, 욕망, 탐욕, 갈등, 사랑을 잘 섞어서 반죽하여 보여줬다. 긴 인생을 살아낸 작가의 힘이 드러난 수작이다. 그러나 소설 '은교'에는 은교가 없다는 것, 남성들의 욕망 또는 사랑의 대상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은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은교

박범신 지음,
문학동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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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박범신 #문학동네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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