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은 항일 선열 이중화를 기억하지 않았다

역사에 묻힌 운동가... 교육과 한글 운동 등에서 많은 활동

등록 2012.05.16 14:53수정 2012.05.16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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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바르고 옳게 하고, 글을 바르고 옳게 써서 우리의 정신이 다 하나가 되어 우리나라를 튼튼하게 하여 우리나라의 빛이 널리 퍼지면 우리는 다 같이 그 때에 우리가 우리의 할 바를 한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 할 것."  - 이윤재, <표준 한글사전>의 머리말 중.

이중화의 말이다. 우리 민족의 분발을 촉구하였던 항일 선열 이중화는 조국을 온 몸으로 사랑하였으나, 조국은 그를 기억해 주지 않았다. 여기서 소개하는 이중화(李重華, 1881-1950? 호는 동운)는 일제시기에 독립운동을 했고, 해방정국시기에도 우리나라를 반듯하게 세운 활동을 한 애국지사였다.

a 이중화 선생의 모습 한글학회 홈페이지 소장

이중화 선생의 모습 한글학회 홈페이지 소장 ⓒ 이중화


그러나 6·25전쟁 도중인 1950년 7월 24일 서울 종로에서 인민군에 납치되어 납북된 뒤, 이후 그의 업적은 매몰되었다.(인터넷 "한국전쟁납북사건자료원" 납북자 명단에 나옴.)

납북될 당시의 나이가 70세였다. 그의 후손들도 빈곤에 허덕이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 그런 관계로 지금까지 선열을 제대로 예우할 수 없었다.

필자는 최근에 조선어학회의 항일 선열을 정리하는 도중 항일투쟁을 활발히 하였음에도 독립유공자가 되지 못한 이중화 선생을 발견하였다.

이중화는 1881년 한성시 징청방 두석동(현재 종로1가)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에 10년간 한문을 배웠다. 1899년 9월 민영환이 설립한 흥화학교에 입학한 뒤에 영어와 지리와 역사 과목을 수학하였다. 특히 남궁억 교사에게 영어를 배웠다. 1903년 6월 흥화학교를 졸업한 뒤, 이 학교에서 영어를 강의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해 흥화학교가 폐교되자, 그 해 11월 배재학당에 조선어와 역사지리 교사로 부임하였다.(<배재학보>제일호, 1918, 33쪽) 주시경과 함께 교원으로 활동하였다.

배재학교에서 3·1운동 때 독립선포문을 작성하여 배포한 혐의로 그는 교사 강매, 김진호, 김성호와 학생대표 김병호 등 18명과 함께 일제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아울러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출신 이일선과 독립선언문을 영문으로 번역·인쇄하여 외국인의 집에 배포하기도 하였다.(<배재80년사>, 1965, 448쪽.) 이후 1935년까지 배재학교에서 근속한 뒤, 같은 해 경성 여자 미술학교에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1910년 일제 강점시기부터 그들의 강압통치에 불만을 품고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였다. 조선어학회에 회원으로 가입한 뒤, 1936년 4월부터 1942년 10월까지 조선어학회가 추진하던 조선어사전편찬의 전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6년 8월에는 조선어 표준말 사정위원회의 제3회 독회에 참여하였고, 표준어 제정의 수정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아울러 조선어학회가 추진하던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에도 참여하였다.

일제가 일으킨 조선어학회 사건에 그도 연루되었다. 1942년 10월 1일 서울에서 체포되어 함남 홍원경찰서와 함흥감옥에 수감되었다. 그 때 나이가 62세였다. 일제는 환갑이 넘은 연로한 인사도 구속하여 구타하고 고문을 자행하였다. 아들 이순호와 며느리 지명식(현재 92세)씨가 함흥감옥에 면회를 갔을 때, 그는 감옥 생활의 고통을 얘기하지 않고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이는 지명식씨가 자식인 이봉수(이중화의 직계손자, 현재 56세)에게 전한 이야기다. 


a 이봉수님 이중화의 친손자

이봉수님 이중화의 친손자 ⓒ 박용규


1945년 1월 16일에 이중화는 일제로부터 1심 판결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일제는 예심종결결정문에서 이중화가 "조선어학회가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결사인 줄을 알면서도 사무원이 되어 조선독립의 목적을 위해 수행한 점과, 조선 민중의 민족의식을 앙양시키는 조선어사전 편찬에 종사한 점이 일제의 치안유지법 위반에 해당한다"고 기술하였다. 형기를 모두 마친 뒤 1945년 1월에야 석방되었다. 나이 65세에 풀려났다.

한편 일제시기에 그는 3권의 책을 저술하여 우리 민족에 기여하였다. <경성기략(京城記略)>(1918)은 그가 일제시대 조선의 서울인 경성의 역사를 방대한 문헌에 의거하여 기술한 책이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쓰지 못하게 하고 대신에 조선으로, 조선왕조의 수도인 한성 대신에 경성으로 고쳐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는 책 저술의 배경으로 서울의 명승고적이 일제에 의해 사라지고 훼손됨을 안타까워하며, 보존할 가치가 있는 문화유적이 보존되기를 염원하여 이를 기술하였다고 '머리말'에서 밝혔다. 그는 백제 온조왕 때부터 도읍지 역할을 한 서울의 역사를 시대순으로 전부 서술하였다. 신라 진흥왕의 한강 유역 점령과 고려조 남경의 역사, 조선조 한성의 역사와 문화 유적을 기술하였다. 아울러 일제가 설치한 통감부와 조선총독부에 대해서도 서술하였다. 다만 이 책의 한계는 일제의 총독정치를 제대로 비판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이러한 한계는 그가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면서 극복해 나갔다.

a 경성기략의 겉표지 이중화의 저술

경성기략의 겉표지 이중화의 저술 ⓒ 국회도서관 소장


두 번째 저술인 <경주기행>(1922)은 저자가 배재고보 교원시절인 1918년과 1920년에 걸처 경주에 학생들을 인솔하고 수학여행을 다녀온 뒤에, 신라 천년의 수도였던 경주의 역사와 문화유적을 방대한 역사문헌에 의거해 서술한 것이다. 아울러 신라인의 종교, 미술, 무용(武勇)까지 기술한 점에서 미루어 보면 신라문화유산답사기로 볼 수 있다.

그는 머리말에서 "'기번'에 비기지 못할지로대 김부식의 저서를 읽는 선비여, 조선의 로마라 일컬을 경주에 유람하는 사람들이여, 기왕에 찬란한 우리 미술의 장관이 다시 재현케 함을 도모하기 원하노라"라고 썼다. 아울러 그는 삼국통일에서 신라의 무열왕과 문무왕의 공훈과 김유신의 업적만을 드러내서는 아니된다고 일침을 가하였다. 신라인들이 진취주의의 기상을 유지하는 높은 품성을 가졌고,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한 마음을 유지하여 나라를 위하였기에 통일의 대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고 평가하였다. 이러한 점은 일제시대에도 적용된다고 하겠다.

a 경주기행의 목차 이중화의 저술

경주기행의 목차 이중화의 저술 ⓒ 이중화


세 번째 저술인 <조선의 궁술>(1929)은 조선궁술연구회가 조선역사학계의 권위자였던 이중화에게 편찬을 부탁하여, 그가 저술한 명저이다. 조선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무기였던 활과 화살에 대해, 활쏘기에 대한 일을 방대한 역사문헌에 의거하여 서술하였다. 아울러 1백여 명에 달하는 활쏘기의 달인들의 일화까지 수록하였다. 더욱 빛나는 부분은 활과 화살에 관련된 수많은 어휘를 수집하여 우리말로 뜻풀이를 한 점이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조선민족의 꺾이지 않는 기상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오늘날에도 이 책의 중요성이 인식되어 <새롭게 읽는 조선의 궁술>(이성곤 옮긴이, 국립민속박물관, 2008)로 쉽게 풀이되어 나왔다.

a 조선의 궁술 이중화의 저술

조선의 궁술 이중화의 저술 ⓒ 이중화


해방 뒤 그는 다시 조선어학회가 추진하던 <조선말 큰사전> 편찬의 편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큰 사전에 실린 우리나라의 역사와 관련된 제도와 음식에 대한 용어를 그가 풀이하였다. 1948년 한글학회가 재단법인으로 설립될 때, 학회를 위해 경기도 부천에 있는 9962평에 달하는 토지를 기증하였다.(<한글>107, 1949, 71쪽) 1949년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은 인사들이 조직한 십일회에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a 십일회 회원 모습 앞줄 왼쪽부터 김윤경, 정세권, 안재홍, 최현배, 이중화, 장지영, 김양수, 신윤국

십일회 회원 모습 앞줄 왼쪽부터 김윤경, 정세권, 안재홍, 최현배, 이중화, 장지영, 김양수, 신윤국 ⓒ 한글학회


아울러 그는 한글학회의 후원재단인 '한글집'의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였고, 1948년부터 국학대학의 학장을 역임하였다.(이상의 이중화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서술은 이강로의 「동운 이중화 스승」(<조선어학회수난 50돌 기념 글모이>, 한글학회, 1993.)을 참조하여 작성함) 학장으로 재임 도중에 6·25전쟁 때 인민군에 납치되었다.

아들 이순호는 아버지 이중화가 '학교에 나가신 뒤에 돌아오지 않으셨다'는 말을 최호연(당시 조선어학회에서 이중화와 함께 근무함)에게 하였다고 한다.(최호연, <조선어학회, 청진동 시절>하, 진명문화사) 아직까지 생사확인도 알지 못한 상태에 있고, 지금까지 정부로부터 포상하나 받지 못하였다. 이제라도 정부 기관은 그에 대해 정당한 대우를 해주길 바란다.
#조선어학회 #한글학회 #이중화 #조선의 궁술 #조선어학회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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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한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과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와 한글학회 연구위원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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