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서태후와 광서제는 황궁을 떠나 시안까지 도피했다. 지밍이 역참에서 하루 머문 흔적인데 초상화의 글자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써 있다.
최종명
강아지랑 놀고 있던 아가씨가 입장권을 보여달라고 한다. 왜 또 보자는 거냐고 했더니 입장권 한쪽을 찢으며 입장료에서 일부를 배분 받기 위해서라고 한다. 역시 재밌고 합리적인 나라다.
두 번째 독립 가옥은 하(贺)씨 일가가 살던 곳으로 1900년 청나라 서태후와 광서제가 하룻밤을 묵은 곳이다.건물 옆 좁은 협벽(夾壁)에 '하룻밤의 행궁(一夜行宮)'이라는 간판이 선명하다. 안으로 들어서니 벽돌 벽에 '홍희접복(鴻禧接福)' 4글자가 양각돼 있다. '자희태후의 큰 덕으로 복을 이어받다'는 뜻이니 분명 서태후의 흔적이다.
청나라 말기 부청멸양(扶清滅洋)을 천명한 의화단 사건의 여파로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으로 진군하자 황급히 황궁을 떠났다.서태후와 광서제는 이곳 역참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시안(西安)까지 도피했다.
안으로 들어서니 마당에는 빨래가 널려 있고 문 앞에는 검은 개 한 마리가 낮잠을 자고 있다. 두 개의 연하늘색 쪽문과 창문이 한낮의 오후마냥 여유롭다. 방으로 들어서니 벽에 서태후와 광서제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청나라 황실 초상화가 그렇듯 의관을 갖추고 의젓하게 앉은 모습이 익숙하다.
서태후 초상화에는 문종자희황후(文宗慈禧皇后)라고 적혀 있는데 보통 태후라고 부르지 황후라고는 하지않는 것도 이상하지만 길거리에서 사 온 초상화라는 냄새가 너무 풍긴다. 재미있는 것은 강희제 초상화의 덕종광서황제(德宗光緒皇帝)라는 글자의 방향이다. 서태후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광서제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써 간 것이다. 그렇게 세인들은 서태후와 광서제의 등을 돌려 놓고있다.
초상화를 다른 곳에서 산 것인지 원래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조카이자 양자인 광서제는 자립하고 자강하려 했지만 서태후의 권력에 밀려 숨조차 쉴 수 없던 시절이다. 게다가 총애하던 진비(珍妃)는 황궁을 떠나기 전 서태후의 명령에 의해 우물에 투신해 자살하지 않았던가.피난 중 하룻밤 함께 숙박했지만 광서제의 슬픔을 짐작해 글자의 방향을 달리한 것은 아닐까? 몸은 아니어도 글자만이라도 반대로 세워 억울한 심정을 이입한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