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 즈음의 아내가 그렇게 예쁘다니... 부럽다

<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를 읽고

등록 2012.07.30 20:39수정 2012.07.30 20:39
0
원고료로 응원
아, 그러고 보니 저녁도 굶었다.
몸을 씻고 자리에 누웠는데 밤 열두 시다.
예쁜 아내, 손잡을 힘조차 없다.                    
- <밥 한 숟가락 기대어> 64쪽 '유월'

서정홍 시인의 새 시집<밥 한 숟가락 기대어>를 내려놓으며 가장 기억에 남는 단어는 "예쁜 아내"였다. 대충 쉰 즈음의 아내일 텐데 시인 서정홍은 아내를 '예쁜 아내'라 한다. 남편이야 아내를 그렇게 생각한대도 남들에게 아내가 예쁘다고 말하는 게 참 쑥스러울텐데 시인은 아내를 '예쁜 아내'라 말했다.


한편으로는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럽다. 솔직히 부러운 마음이 크다. 우리 남편이라면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물론 술김에는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신 차리고는 술김에 한 말을 주워담으려 할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그걸 시로 써서 시집으로 만들어 동네방네에 아내가 예쁘다고 알린다.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사실 아내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묻어나는 시는 이 시뿐이 아니다. 

아내한테 말했습니다.

"여보, 이렇게 큰 나무 앞에 서면
저절로 머리가 숙여져요,"

아내가 말했습니다.

"여보, 나는 일 년도 안 된
작은 나무 앞에 서 있어도 저절로 머리가 숙여져요."
 - <밥 한 숟가락 기대어> 42쪽 '아내는 언제나 한 수 위'


아내의 말 한마디에 시인은 아내가 자신보다 한 수 위라고 한다. 아내의 말이 진짜로 시인보다 한 수 위이기 때문에 이런 시를 쓰기도 했겠지만,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시인이기에 이런 시를 쓸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경청의 단계 중 '배우자 경청'이 가장 낮은 수준의 '경청법'이라고. 보통 사람은 아내의 이야기를 제일 흘려서 듣는다. 하지만 시인은 아내의 말을 귀한 말로 새겨듣고 있다. 그러니 같은 여자로 어찌 안 부러울 수가 있을까.

부탁하네, 동무여!
두 번 다시는, 우리 마누라 앞에서
돈 자랑 좀 하지 마시게.


나도 명색이 사내놈인데
나라고 어찌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마누라
편하게 모시고 싶지 않겠는가.
 - <밥 한 숟가락 기대어> 72쪽 '사람을 살리는 일인데'

솔직한 글이다. 옛 동무를 만나면 꼭 그렇게 돈 자랑을 하는 친구들이 있다. 앞에서는 웃으면서 그 자랑에 맞장구를 치더라도 돌아오는 마음은 참 편치 못하다. 모두 똑같은 시간을 살아 왔는데 나는 그 시간에 뭘 하고 살았나 하는 자괴감도 든다. 그 불편한 마음을 '사람을 살리는 일인데'라는 제목의 시로 썼다. 그 시 속에도 아내에 대한 사랑이 담뿍 들어 있다. 아내를 모시고 싶다니 말로만 들어도 참 기분 좋다. 시는 또한 농사일로 받는 수입이 국가가 정한 최저임금조차 안 된다 하더라도 그 어떤 일보다도 사람을 살리는 귀한 일이 바로 농사라 말한다. 

작년에 나는 월간 <작은책> 강좌에서 서정홍 시인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농사에 관심 있어 하는 큰아이와 함께 강의를 들었다. 시인은 농사에 관심이 있다는 중학생 큰아이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리고 방학 때 한 번 친구들과 놀러 오라며 연락처를 알려주셨다. 큰아인 뭐가 좋은지 연방 웃었다. 아이는 용기가 없는지 아직 시인의 집에 놀러 가지 못했다. 나는 그날 집으로 돌아와 <58년 개띠> 시집을 읽었다. 글을 읽으면서 쌀 한 톨 키워보지 못한 내 삶이 부끄러웠다. 시인은 나와는 너무 먼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새로 나온 시집 <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를 읽고 감히 글을 쓸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선뜻 시집을 잡지 못했다. 그러고 며칠이 지나 마음을 다잡고 시집을 읽기 시작했다. 글은 쓰지 못 하더라도 시를 읽어보기만 해도 마음이 깨끗해질 거 같았다.

책 속의 시인은 농사를 천직으로 가장 귀한 일로 생각하지만, 시인도 역시 농사일을 힘들어하고 있었다. 의외였다.

"확 때려치고 싶을 때마다 아이들이 눈에 밟혀 논밭으로 간다네."
"여보, 우리 옛날처럼/ 농사짓는 사람 하지 말고/ 돈 주고 사 먹는 사람 하모 좋겠소."

멀게만 느껴졌던 시인이 조금은 가깝게 느껴졌다. 덕분에 쉽게 글을 쓸 용기를 얻었다. 시인은 농사가 귀하고 힘든 일이라고 이렇게 시를 써서 나에게 알려 주는데 말없이 농사를 짓는 농부는 얼마나 그 수가 많을까? 여태 내 입에 들어간 먹을거리 농사지어준 농부님들은 말씀을 안 하셔서 그렇지 얼마나 힘드셨을까? 복더위에 밥맛 없어 힘들게 점심을 먹으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는 고마운 마음에 밥알 한 톨 남김 없이 귀하게 먹어야겠다 생각했다. 

시인의 시는 따뜻하고 착한 마음이 느껴진다. 특히 시 '그리운 사람'이 그렇다. 시인은 동무를 만나러 교도소에 갔다. 그런데 주민증을 안 가져 왔더랜다. 시인은 주민증을 대신해서 시집 <58년 개띠>를 꺼내서 표지에 실린 소개 글을 정문 경비에게 보여 주었다.

그걸 쭉 읽던 경비가 시집을 주민증 대신 맡겨 두고 들어가라 했다. 그 날, 시집을 주민증 대신 경비실에 맡겨 놓고 동무를 면회하고 돌아왔다. 나는 가끔 가난한 시인의 시집을 주민증 대신 쓰게 해 준 그 사람이 그립다.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 <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 115쪽 '그리운 사람'

시집을 주민증으로 받아 준 경비의 이야기에 내 마음이 훈훈하다.  너무 부끄럽지만 이 시집을 읽으며 나도 더 늙기 전에 조금만이라도 씨앗을 뿌리고 가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

서정홍 지음, 최수연 사진,
보리, 2012


#서정홍 #밥 한 숟가락 기대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김건희·채상병특검법 부결, 여당 4표 이탈 '균열' 김건희·채상병특검법 부결,  여당 4표 이탈 '균열'
  2. 2 과음으로 독일 국민에게 못 볼 꼴... 이번엔 혼돈의 도가니 과음으로 독일 국민에게 못 볼 꼴... 이번엔 혼돈의 도가니
  3. 3 한국만 둔감하다...포스코 떠나는 해외 투자기관들 한국만 둔감하다...포스코 떠나는 해외 투자기관들
  4. 4 "KBS 풀어주고 이재명 쪽으로" 위증교사 마지막 재판의 녹음파일 "KBS 풀어주고 이재명 쪽으로" 위증교사 마지막 재판의 녹음파일
  5. 5 [이충재 칼럼] 윤 대통령, 너무 겁이 없다 [이충재 칼럼] 윤 대통령, 너무 겁이 없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