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원 위에 건설된 파림좌기가 멀리 보인다. 풀을 뜯고 있는 당나귀들이 가까이 있다.
김종성
중국에 진출한 유목민족이 농경문화를 수용하는 것을 보고 중국인들은 "우리 쪽에 동화됐다"고 자찬하고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그들은 매우 타락하고 말았다"고 평가했지만, 유목민족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농경지대에 와서 유목문화를 유지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기 때문이다.
유목민족에 관한 세계적 권위자인 르네 그루쎄가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에서 언급한 것처럼, 유목민족은 새로운 생활환경에 금방 적응하는 사람들이었다. 사실, 누구라도 유목민이 되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떠돌아다니다 보면, 현지 문화에 쉽게 적응하기 마련이다. 유목민족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중국에 '동화'된 게 아니라 '적응'했을 뿐이다.
내몽골 유목민족은 이처럼 중국 농경지대로 나가 농경민족으로 전환되기도 쉬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중국의 공격을 받아 파멸될 가능성도 갖고 있었다. 본거지가 중국과 가까웠기 때문에, 이들은 항상 이런 위험을 피할 수 없었다.
반면, 외몽골 유목민족은 중국을 압박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은 대신에, 중국의 공격을 받아 파멸될 가능성도 상대적으로 낮았다. 중국 군대가 외몽골 초원으로 가자면 내몽골 초원을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시간으로 보나 거리로 보나 중국이 외몽골을 제압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외몽골 유목민은 설령 중국 군대에 쫓긴다 해도, 중앙아시아나 중동 쪽으로 도주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흉노족이나 돌궐족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몽골에서 동유럽까지 펼쳐진 유라시아 초원지대에서 여전히 유목문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칭기즈칸의 몽골족은 외몽골 초원에서 기반을 잡은 뒤 내몽골 초원으로 나갔다. 다시 말해, 그들의 본거지는 외몽골에 있었다.
이 점은 몽골족이 대제국의 해체 후에도 여전히 몽골의 이름으로 나라를 유지하는 비결을 설명해준다. 내몽골이 아닌 외몽골에서 유목민족의 첫발을 내디뎠고 그곳에서 기반을 잡았기에, 몽골족은 몽골제국의 잔존세력을 분쇄하려는 명나라 군대의 추격을 피해 외몽골로 되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또다른 요인들도 함께 작용했다. 14세기 후반에 한민족과 여진족이 명나라를 교란한 덕분에 몽골제국 잔존세력이 여유를 얻은 측면도 있었다.
특히 고려 말의 최영과 조선 초의 정도전이 요동정벌운동을 일으켜 명나라의 신경을 건드린 것은 명나라가 몽골제국 잔존세력에게 더 이상의 신경을 쓰지 못하도록 하는 기능을 했다. 한민족과 여진족이 명나라를 교란하지 않았다면, 몽골족은 어쩌면 외몽골까지 잃고 중앙아시아·중동·동유럽 쪽으로 도피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다른 요인들도 함께 작용하기는 했지만, 몽골족이 계속해서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던 최대 요인은 그들의 출발지가 외몽골이라는 점에 있다. 만약 내몽골에서 출발했다면, 수많은 유목민족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나라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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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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