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수뇌부' 장도영과 박정희5.16 쿠데타 며칠 뒤 장도영(왼쪽)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박정희 부의장이 한 자리에 선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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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올해는 1972년 유신독재체제가 출현했던 때로부터 꼭 40년이 되는 해다. 유신독재체제 출현 40년이 되는 올해 40년 전의 풍경들을 무시로 떠올리게 되는 기현상 속에서 하루하루를 산다. 곤혹스럽고도 참담한 심정이다.
1969년 육군에 입대하여 후방(논산훈련소 조교), 베트남 전장(백마사단 도깨비연대 전투병), 최전방(철책선 경비부대 분대장)을 고루 경험하고 1972년 5월 제대한 나는 7월초 이른바 '7·4남북공동선언'을 접한다. 당시 중앙정보부(오늘의 국가정보원)장이었던 이후락이 박정희의 밀사로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회담을 하고 돌아온 후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된 것이 '7·4남북공동선언'이었다.
일시에 온 나라가 금방 통일이 될 것 같은 환상 속으로 빠져들었다. 국민들은 환호작약했고, 돼지를 잡아 잔치를 벌인 이북 실향민들도 있었다. 남북적십자회담이 시작되고, 국가조절위원회가 설치되어 상호방문 형태로 회담이 진행되는 등 남북 화해 무드와 통일 분위기는 극대화되었다.
그렇게 분위기를 만들어놓고 나서 박정희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그 계엄령 하에서 유신독재체제를 출현시켰다. 스스로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종신집권의 기틀을 마련하면서 내세운 최대 명분은 민족통일과 국가번영이었다.
이때도 대다수 국민이 환상에 빠져들었다. 박정희를 지지하고 유신독재체제를 받아들이는 것만이 나라를 발전시키고 통일을 이룰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다. 상당한 지식인이었던 내 아버지도 그 환상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밥상머리에서 아버지는 누누이 나와 누이동생에게 시월유신 국민투표에 참여하여 찬성을 찍도록 요구했다. 그것이 애국하는 길이라고 열렬히 강조했다.
나는 밥상머리에서는 아버지에게 대항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반대표를 결심했다. 1969년 10월 논산훈련소에서 맞은 삼선개헌 국민투표 때 '공개투표'를 경험했고, 그 공개투표 상황 속에서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졌던 나는 그때부터 박정희에 대한 혐오감도 갖고 있었다. '7·4남북공동선언'도, 남북교류도 국민을 속이기 위한 계략이었고 유신독재체제를 수립하여 종신집권의 길을 만들려는 술수였음을 확신했다. 나는 그것을 처음 국민주권을 행사하게 된 누이동생에게 설명했고, 결국 나와 누이동생은 유신체제 국민투표에서 과감히 반대표를 던졌다.
개표 결과가 발표되었을 때 나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국적으로 무려 93%가 유신을 찬성했고, 우리 고장(충남 태안)에서는 더욱 놀랍게도 97%의 찬성률을 보였다. 나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꼈다. 우리 고장의 반대 3%에 우리 남매가 속했다는 사실은 이상한 공포감마저 갖게 만드는 것이었다.
나는 국민 절대다수가 미혹과 환상에 빠져버렸음을 실감했고, 1969년의 삼선개헌 국민투표 때처럼 군대에서는 공개투표가 실시되었으리라는 것을 확신했고, 그리하여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와 좌절에 빠져들고 말았다.
유신독재 시절을 살아오면서, 그리고 유신독재의 유물인 제5공이라 불리는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시절을 겪어오면서 나는 술에 취하면 곧잘 '우민대중'에 대한 증오심을 드러냈다. 우민대중의 주축인 50·60대 늙은이들이 빨리빨리 사라져줘야 이 나라가 산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옆구리가 결리는 현상을 경험했다. 내 또래 젊은 층에게도 희망을 걸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 또래 젊은 층도 절대 다수가 박정희의 계략과 술수, 종신집권 야욕에 말려들어 시월유신 국민투표 때 찬성표를 던졌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너무도 암담했고, 극심한 고독감을 감내해야 했다.
그때의 고독감은 지금도 여전하다. 어느덧 60대 중반 세월을 살고 있는 지금 나는 여전히 외롭고 암담하다. 내 또래 노장들 가운데서 저 40년 전 박정희의 야욕에 말려들어 미혹과 무지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우민대중'의 실체를 확인한다.
돌이켜보면 40년 전 시월유신 국민투표 때의 경이적인 93% 찬성률은 그야말로 '국민대통합'의 장관(壯觀)이었다. 군대에서는 공개투표를 자행했건, 공무원들이 어떤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복무했건, 국민들이 어떻게 미혹과 환상과 무지 속으로 녹아들었건 간에 '국민대통합'은 그렇게 달성되었다.
죽는 순간까지 대통령직을 유지했던, 그리하여 종신집권의 야욕을 이루었던 박정희의 딸이 오늘 집권여당의 대통령 후보로 집권의 꿈을 불태우고 있다. 그녀는 가는 곳마다 '국민대통합'을 외치고 다닌다. 국민대통합의 밑바탕인 통절한 자기반성과 치열한 역사의식 따위는 거의 백지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어쩌면 그래서 더욱 '국민대통합'이라는 헛구호를 남발하는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40년 전 유신독재체제를 출현시키며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국민들을 미혹과 환상과 무지 속으로 몰아넣어 93%를 상회하는 '국민대통합'을 이루었던 그 '장관'의 재판을 그녀는 꿈꾸는지도 모른다.
참 군인이었던 안중근 의사가 만주 하얼빈 역에서 조선병탄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한 지 정확히 70년이 되던 해, 유신독재체제의 종신대통령 박정희는 술자리에서 부하의 총탄에 맞아 이승을 떠났다.
하지만 유신의 망령은 죽지도 소멸되지도 않았다. 여러 가지 형태로 이 나라에 출몰하더니, 유신독재체제가 온갖 비극을 몰고 이 땅에 출현했던 1972년으로부터 정확히 40년이 되는 2012년 올해 유신의 흉령이 온 나라에 이상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우리 국민은 40년 전의 미혹을 극복하지 못하고 올해 또다시 유신의 부활을 용인할 것인가! 깊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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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유신 40주년에 바라본 박근혜의 '국민대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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