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를 시작한 후 나온 인쇄물에 잡티가 묻어나자 해당 색깔의 유니트를 열어 인쇄판(CTP) 판을 다시 닦아주고 있다. 인쇄가 일단 시작되면 보통 시간당 7~8000장에서 1만 장까지 찍어내지만 그 준비 과정에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백병규
인쇄업계의 물량이 전반적으로 줄면서 대형 인쇄업체들부터 단가 낮추기 경쟁에 나섰다. 대형 업체들은 여러 가지로 단가 면에서 유리하다. 종이는 물론 각종 인쇄 재료들을 중소업체 보다 훨씬 좋은 조건에 사들인다. 물량이 많다 보니 제지업체나 인쇄재료 공급업체들과의 직거래를 통해 중소업체들보다 10%에서 크게는 30%까지 저렴한 가격에 사들일 수 있다. 그만큼 중소업체에 비해 '단가 경쟁력'이 있는 셈이다.
특히 중소업체들 대부분이 부담하고 있는 금융비용 측면에서도 대형업체들이 훨씬 유리하다. 여기에 CTP(과거 필름을 떠 소부판을 굽던 공정을 생략하고 컴퓨터에서 바로 데이터를 직송해 출력하는 인쇄판) 등 인쇄 앞공정과 접지나, 제본 등 인쇄 뒷공정을 모두 처리하는 일관시스템을 갖춰 단가 면에서 중소업체에 비해 훨씬 우위에 서 있다. 대형인쇄업체들의 브랜드 파워도 중소인쇄업체의 물량을 빨아들이는 주된 메리트 가운데 하나다.
인쇄 시장의 큰 고객인 대기업과 유통업체들은 인쇄업자들의 이런 '출혈 경쟁'을 100% 이상 활용하고 있다. 을지로 3가에 있는 세원제지의 남석형 이사는 "인쇄업체들이 너도나도 단가를 낮추다 보니까 빚어진 일이어서 대기업 탓이라고만 말 할 수는 없다"며 "그러나 대기업 담당자들을 보면 어떻게든 단가를 낮추는 것이 바로 실적으로 이어져 이런 상황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말한다.
예상과는 달리 대기업 인쇄 물량을 이름 난 대형 인쇄업체에서 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대형 인쇄업체들은 어기간해선 대기업 입찰에는 참여하지도 않는다. 최저가 입찰 방식이기 때문에 단가가 너무 낮은 것도 그 요인 가운데 하나다. 대기업들은 또 직접 인쇄 물량을 발주하는 경우도 드물다. 기획사 등을 대행사로 내세우고, 그 사이에는 또 대기업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브로커'들이 끼어 있기 마련이다.
그래도 물량이 많고, 결제조건이 나은 편이어서 여기에 목을 매는 인쇄업자들이 많다. 실제로 대기업 일감 하나만 받으면 수십 명 먹거리는 된다. 그러나 위험부담도 크다. 대기업과 특수 관계에 있는 인사를 임원 등으로 영입해야 하고, 더불어 꽤 많은 영업비용을 써야 한다. 자금에 여유가 없는 업체로서는 대기업 물량 수주에, 또 그 유지에 사활을 걸지 않으면 안 된다. 요즘에는 계열 제지사 등을 내세워 아예 인쇄업체들을 사실상 '계열화'하는 움직임까지 있다. 대기업 물량과 계열 제지업체의 용지 공급을 연계하고, 제지업체가 이를 통해 인쇄 시장까지 엿보는 추세다.
인쇄 단가에 대해서는 대기업만 그런 것은 아니다. 출판 등 다른 발주처도 마찬가지다. 생존의 위기에 몰린 중소인쇄업체들도 인쇄 단가를 올려달란 말은 꺼낼 수도 없다. 인쇄기를 놀리느니, 물량만 있다면 낮은 단가라도 얼마든지 감수할 태세가 돼 있다. 지난해에만 을지로에서 사라진 인쇄 관련 업체 수는 600여 개나 된다.
이 때문에 인쇄 단가는 지난 10년 동안 오르기는커녕 오히려 떨어졌다. 대기업들은 그동안 매년 인쇄단가를 10~15%씩 떨어트려 왔다. 1990년대 중반 연(인쇄용지의 단위 : 1연은 국전이나 4×6전 전지 500장)당 3000~4000원씩 갔던 인쇄비는 이제 연당 1000원 수준으로 떨어졌다. 10여 년 사이에 인쇄비용이 3분 1, 4분의 1 수준으로 폭락한 것이다.
단가 하락에는 인쇄 기술의 발전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90년대에는 최고 성능의 오프셋 인쇄기의 시간당 인쇄 속도가 전지 5000~7000장 정도였지만, 지금은 시간당 2만 장까지 찍는 기계들이 많다. 그래도 연당 1500~2000원 정도는 돼야 '적절한 마진'을 보장받을 수 있는데, 지금 단가는 연당 1000원 수준으로 떨어졌다. 연당 800~900원, 심한 경우에는 500원인 경우도 있다. 반면 종이 값은 지난 몇 년 동안 30% 이상 올랐다. 대기업에서 공급하는 알코올이나 잉크 등 재료비용도 오를 만큼 오른다. 서광프린텍 현 사장의 말이다.
"쉽게 말하면 지금은 4도 컬러 인쇄의 경우 인쇄비로 시간당 10만 원은 받아야 채산이 맞는다. 24시간 풀로 돌렸을 때 이야기다. 그러나 시간당 7~8만원 받기 힘들 때도 많다."시간당 10만 원이면, 어림잡아 한 달 25일 거의 쉬지 않고 돌릴 때 5000만원 정도가 인쇄비로 떨어진다. 디자이너·경리 등 지원인력을 최소화하더라도 하루 종일 인쇄기를 돌리자면 인건비(낮밤 교대 2조, 1조 2명 기준)만 1500만 원이상 들어간다. 여기에 임대료(500~1000만 원), 전기료(200~300만 원), 잉크나 부품 등 재료비와 부품비(1000만 원) 등 대략 3000여만 원이 들어간다. 현 사장처럼 금융비용(리스료) 부담이 있을 경우 1000만 원 정도 남을까 말까다.
중소인쇄업체들의 치명적인 '덫' 미수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