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8월 평양의 이인모 선생의 집을 방문해 이 씨의 가족들과 현관에서 함께 찍은 사진. 뒷줄 가운데가 조영삼씨
조영삼씨 제공
조영삼씨가 서울을 떠난 건 지난 1993년 11월이다. 아르헨티나로 건너가 선박사업을 하고 있던 큰형의 사업을 도우기 위해서였다. 이에 앞서 조씨는 1992년 5월 남북고위급회담과 관련 특수공무집행방해죄로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직후 부모님의 희망 때문에 아르헨티나로 출국했었다.
조씨의 당시 구속은 북한 연형묵 총리와 남의 국무총리가 회담하는 이른바 '남북고위급회담'장인 신라호텔에 당시 비전향장기수 신분으로 남한에 머물고 있던 이인모씨를 동행해 북측대표단을 만나기 위해 들어가려다 이를 제지하는 경찰에게 상해를 입혔다는 혐의였다.
1990년대 초반 이인모씨와 인연을 맺은 조영삼씨는 2년여 동안 거동이 불편한 이인모씨의 수발을 들면서 지내던 중 이인모씨를 동행해 신라호텔에 들어가려다 연행된 후 구속되었던 것.
아르헨티나에 머물던 조씨는, 이인모씨와 평양 가족과의 중계 역할을 했던 간호사 출신 독일교포로부터 '죽기 전에 한 번 꼭 보고 싶다'는 이씨의 엽서를 전달 받고 입북을 결심한 바 있다.
그는 이에 대해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일생일대의 장고에 장고를 거듭한 끝에 이인모 선생이 타계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만나야겠다는 결심을 한 후, 독일을 거쳐 1995년 8월 15일 평양으로 들어가 이인모 선생을 만났다"고 설명한 바 있다.
평양 체류 한 달여 만에 북한을 나온 조영삼씨는 입북 경유지였던 독일로 들어간 후 독일정부에 정치적 망명을 신청했다. 이후 3년여 동안 망명자 수용소에 수감된 채 심사를 거쳐 독일정부가 정치적 망명을 허가함으로써 지금까지 독일에 체류했던 것. 이 과정에서 독일 국적이나 시민권 취득이 가능했음에도 조영삼씨는 한국 국적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서울구치소에 구인된 조씨 "조국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지난 12월 31일 20년만의 귀국 당일 국가정보원에 연행된 조영삼씨는 이날 오후 11시까지 1차 조사를 받았다. 이후 서울구치소에 구인된 후 다음날인 1월 1일에도 조사를 받았다. 2일에는 면회가 허락되었다. 2일 오후 서울구치소에서 만난 조영삼씨는 다소 초췌한 모습이었다. 조영삼씨는 이날 면회에서 귀국 당일 구인된 상황을 설명하면서 다소 격앙된 모습을 보이기는 했으나 비교적 차분한 모습이었다.
조씨는 "조국에 첫 발을 내딛자마자 국정원은 나를 연행해 갔다, 구순 노부모님께 절이라도 하게 한 다음에 사법 처벌 수순을 밟아도 될 텐데 너무 가혹한 행위가 아닌가"라고 말했다. 조씨는 이어 "그렇다고 해도 내가 한 행위가 법에 저촉된 부분이 있다면 담담하게 처벌을 받아들이겠다, 새로운 삶을 내가 사랑하는 조국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말했다.
조씨는 지난 2002년 경남에서 노동운동을 하던 부인을 독일로 초청해 결혼한 후 현재 1남을 두고 있는 중이다. 한편 조씨의 부친은 현재 만 90세로 인천 부평에 거주하고 있으며 건강이 상당히 안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씨의 귀국 결심은 그의 부모님이 죽기 전에 막내 아들을 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 때문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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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순 부모에게 절도 못드렸는데...너무 가혹한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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