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순 앞둔 부모의 소원 "아들 한번 보고잡소"

독일 체류 망명자 조영삼씨 노부모 "한국에 들어올 수 있도록 도와달라"

등록 2011.06.18 18:39수정 2012.11.13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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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순을 앞둔 늙은 부모의 소원은 단 한 가지. 18년간 보지 못한 아들을 보고 싶다는 것. 외국에 머물고 있는 자식을 눈을 감기 전에 한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것이다. 또 이들 노부부는 그 아들이 보고 싶어 건강을 잃지 않기 위해 단 하루도 산책을 빼놓지 않으며 건강을 돌보고 있다고도 했다.

노부부가 그토록 만나기를 바라고 있는 아들의 아이와 아내는 현재 한국에 있다. 또 아들 본인도 귀국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하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다. 정치적 이유가 이들의 만남을 가로 막고 있기 때문.

노부부는 조철우(89), 이정순(83)씨, 그들이 만나고 싶어 하는 자식은 현재 독일 바이에른 주에 거주하고 있는 조영삼(52)씨다. 조씨 또한 노부모를 못 잊어 귀국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 그가 서울을 떠난 게 1993년 11월이기에 벌써 햇수로 19년째다. 하지만 그의 신분이 만남을 가로막고 있다. 바로 '정치적 망명자' 신분이기 때문.

그는 독일 정부에 지난 1995년 정치망명을 신청했고 3년여의 망명수용소 생활을 거쳐 독일정부가 이를 허가함으로써 망명여권으로 16년째 독일에 체류 중이다. 그가 독일정부에 정치적 망명을 신청한 이유는 다름 아닌 한국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채 북한을 방문했기 때문이다. (관련기사 : "18년간 어머니를 못 뵈었습니다, 도와주세요")

장기수 이인모씨와의 질긴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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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삼씨가 자신이 현재 근무중인 회사에서 동료인 빅톨( Victor)과 함께 찍은 사진. ⓒ 조영삼

북한 방문은 그와 숙명적 관계를 맺었던 한 노인의 간절한 부탁 때문이었다. 바로 지난 1993년 북한에 송환되었던 미전향 장기수 이인모씨와의 질긴 인연 때문. 조씨는 이인모씨와 1990년대 초 관계를 맺었다. 이인모씨가 경남 김해시 진영읍에 있는 김상원씨 집에 거주하고 있을 당시였다. 이씨와의 만남에 대해 조씨는 이메일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1990년경 한겨레 지국을 정리한 후 큰형이 있던 아르헨티나로 가기 위해 준비하던 중 우연히 서점에 들러 월간 <말>지를 읽었는데 충격적인 기사를 읽었다. 바로 비전향 장기수들이 갖은 회유와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남한 땅에서 삶을 꾸려 가고 있다는 기사 내용이었다."


"그들의 사상과 이념에 동조하지는 않지만 신념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면 젊은 내가 그들과 함께 하며 돕는 것이 더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 아르헨티나로 떠나려던 계획을 보류 했다."

<말>지에서 읽은 기사 한 꼭지가 그의 인생 항로를 바꿔놓은 것이다. 이후 조씨는 기사에서 나온 비전향 장기수인 한창우 선생이 운영하던 김해시 진영읍에 있는 청둥오리농장에서 일을 도와 주면서 한 선생과 함께하고 있었다.


"농장 정상화를 위해 구슬땀을 흘리던 중 처음으로 이인모 선생에 대한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농장에서 백여 미터 떨어진 한때 정치를 했다는 김상원씨 집에 기거하고 있다가 고문으로 지병이 악화되어 부산대학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부산대학 병원에 들러 병상에 누워 있는 이인모 선생을 처음 대면했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피골이 상접한 얼굴, 퀭한 두 눈, 한 쪽 눈은 검은 눈동자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하얗게 변색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마 한 쪽은 폭탄 맞은 자국처럼 푹 파여 있었다. 그리고 다리는 맛이 간 오징어 다리처럼 흐느적거렸다"

그 후 그는 2년여 동안 이씨의 수발을 들면서 함께 생활했다. 그러던 중 1992년 5월 북한 총리와 남한 국무총리가 회담하는 이른바 '남북고위급회담' 장인 신라호텔에 이인모 선생을 동행해 북측대표단을 만나기 위해 들어가려다 이를 제지하는 경찰에게 상해를 입혔다는 혐의(?)를 쓰고 '특수공무집행 방해죄'로 2년여에 가까운 형을 살기도 했다. 이인모씨는 조씨가 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1993년 3월 북에 송환되었다.

문제는, 조씨가 출감한 직후인 1993년 11월 아르헨티나로 건너가 선박사업을 하고 있던 큰형의 사업을 도우면서 일에 열중하고 있던 중 평양에 거주하고 있던 이인모씨가 보내온 한통의 엽서가 전달되면서부터였다.

엽서는 이인모 선생이 송환되기 전부터 이 선생과 평양의 이인모 선생 가족과의 중계 역할을 했던 간호사 출신 독일교포가 그에게 전했다. 엽서는 평양의 우표가 붙은 채로 전달되었으며 내용은 이인모씨가 '죽기 전에 한번 꼭 보고 싶다'는 거였다.

조씨는 이씨의 의사를 전달 받은 후 '일생일대의 장고에 장고를 거듭한 끝에 이인모 선생이 타계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번 만나야겠다는 결심'을 한 후, 독일을 거쳐 지구를 거의 정확히 한 바퀴나 돌아서 1995년 8월 15일 평양으로 들어가 이인모씨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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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8월 평양의 이인모 선생의 집을 방문해 이씨의 가족들과 현관에서 찍은 사진. 정중앙에 서 있는 사람이 조영삼씨다. ⓒ 조영삼


이씨와의 운명적 만남을 끝낸 조씨는 북에서 나온 후 방북 코스를 되밟아 독일로 들어가 독일정부에 정치적 망명을 신청했고 3년여의 심사 끝에 독일정부가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망명자 신분으로 현재까지 독일에 머물고 있는 것.

"내나라 내땅으로 돌아가 불효를 속죄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 

독일 체류 16년 동안 조씨는 결혼도 했다. 그의 표현대로 한다면 지난 2002년경 '한국에서 비행기로 보쌈해 온 엄지공주보다 쬐끔 더 큰 우렁각시와 늦깎이 결혼을 했다'고. 현재 조 씨의 아내와 외동아들 조한얼(7)은 지난 2010년 8월 15일 귀국해 밀양에 살고 있다. 조씨는 기자와 한 이메일 인터뷰에서 귀국과 관련한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밝혔다.

"분단 비극의 극히 작은 한 조각을 감내하며 세상의 주변부에서 나그네가 되어서 살아왔다. 이젠 저도 오랜 방랑 생활을 내려놓고 싶다. 야속한 세월은 오래 전에 제 청춘을 앗아가 버렸지만 회한은 있을지언정 치열했던 시대의 한 부분을 비껴가지 않았다는 것에 후회는 없다."

"다만 오랜 세월 불효자식을 애타게 기다려온 아버지와 어머니께 죄송하고 송구할 따름이다. 제가 오랜 방랑생활을 청산하고 내나라 내땅으로 돌아가 그동안의 불효를 조금이라도 속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조씨는 독일 체류기간이 8년을 넘겼고 직업도 가지고 있어 독일 국적 취득이 가능함에도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언젠가 한국에 돌아가겠다는 그의 신념 때문. 따라서 현재 그는 정치망명자 신분일 뿐 독일 국적을 취득하지 않았기에 엄연한 국외 체류 한국인이다. 

한편 조영삼씨의 귀국과 관련 독일 프랑크푸르트 영사관의 한영주 영사는 15일 기자와 한 통화에서 "조영삼씨와 관련 현재까지 그 어떤 접촉도 없었다. 구체적으로 독일정부나 조영삼씨가 귀국과 관련해 원하는 서류가 있다면 최대한 협조하겠다"고 말했다.

"보고 싶은 것을 봐야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아닙니까"

다음은 지난 6월 13일 인천 계산구 자택에서 만난 조철우(89), 이정순(83)씨와의 일문일답이다.

- 아드님을 못 본 지가 얼마나 되었는가요.
조철우 : "얼굴 못 본 지가 20년쯤(정확히는 18년째) 되는 것 같습니다. 독일에 있다는 것은 7~8년 전쯤 알게 되었습니다."

- 건강은 어떠신지요.
조철우 : "허리 다친 지 40년이 되다 보니까. 지금은 악화 되어서 통증이 심합니다. 그래도 그 아들 보고 싶어서 운동을 많이 한답니다. 건강해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하루도 빼 놓지 않고 집 주변을 산책하면서 건강을 지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니까 이렇게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 큰아들을 가슴에 묻었다고 하시던데
조철우 : "큰 아들은 교통사고로 3년 전 가슴에 묻었답니다. 12월 14일이었는데 독일에 있는 아들한테는 알리지 말라고 했었답니다. 아마 그 아들은 1년쯤 있다가 지 형님 돌아간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딸은 미국에 있고 둘째는 작전동에서 회사를 다니고 있습니다. 올해 정년퇴직이라고 하더군요."

- 며느님 소식은 듣는지요.
이정순씨 : "며늘아기는 밀양 쪽에서 회사를 다니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디 고생이 많을 겁니다. 아들하고는 그전부터 알았는가 어쩐지는 모르는디 독일에 2번 들어갔다가 결혼식을 올렸다고 합디다. 현재 밀양에 있는디 손주놈하고 여기를 자주 찾아 옵니다. 지난 어버이날도 찾아왔습니다." 

- 아드님을 보고 싶은 부모님 심정을 말씀해주시지요
조철우 : "학교 졸업하고 혼자 돌아다니니까. 속을 몰랐습니다. 아들은 동국대 정외과 나왔는데 저는 아들이 졸업할 때만 갔었습니다. 아비 입장에서 자식은 항상 가슴 속에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작년부터 제 마음이 급하답니다. 나이가 있어 갈 때가 되니까. 그때까지는 그놈을 봐야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정순씨 : "보고 싶은 것을 봐야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전화로 지가 그동안 지 맘대로 살면서 불효를 했으니까 들어와서 효도를 하고 싶다고 하는데 그게 마음대로 안 되는 것 같소. 지 처하고 자식도 여기에 있으니 마음이야 벌써 여기에 있을 것이오만… 또 우리도 갈 때가 되니까 마음이 바쁘지만 부모로서 어떻게 해줄 수 없는 처지가 더 마음이 아프오. 독일에서 빨리 나올 수 있게만 도와주시오."

조철우 : "죽기 전에 3형제가 오순도순 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우리가 죽으면 멀어지는데 우리 없을 때도 형제간에 오순도순 살기 원합니다. 영삼이가 나오면 3형제끼리 우애 있게 사는 걸 보고 죽는 게 마지막 소원이랍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망명자 #조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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