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의 르포르타주 <의자놀이>쌍용자동차 이야기
Humanist
공지영의 르포르타주 <의자놀이>도 한파에 대한 얘기다. 쌍용자동차의 건실한 노동자들이 무려 2646명이나 정리해고 당하였고, 정리해고 중단을 촉구하는 파업에 돌입한 뒤부터 한여름 폭염을 관통하는 77일간의 농성과 회사, 구사대, 용역들의 잔인하고 비인간적 이간질과 경찰의 살인적인 진압에 대한 기록이며, 정부 경제 관료, 법원, 회계법인, 보수 언론 등이 합작이 되어 쌍용자동차를 외국 자본에 불법적으로 팔아먹은 행위에 대한 기록이며,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처절하게 목숨을 버린 22명의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차가운 슬픔에 대한 기록이다. 이것이 천지를 뒤덮는 한파가 아니고 무엇이랴!
나는 우선 이 <의자놀이>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 읽다가 밀쳐두기를 여러 번 하였다. 그건 나의 두려움이었다. '백주 대낮에'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대명천지(大明天地)'라는 말도 있다. 대명천지는 태양이 중천에 떠서 크게 밝아진 세상을 말한다. 크게 밝은 세상은 숨길 수도 감출 수도 없다. 다 드러나게 마련이다. 지금 우리 사는 세상은 점점 대명천지가 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쌍용자동차는 그토록 어두웠단 말인가? 그런 음모와 횡포와 이간질과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을 대면하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고백하자면, 사실 나는 2009년 쌍용자동차 사태에 대해 무관심했다. 아니 냉소적이었다. 맞춤법에도 맞지 않게, '쌍룡'을 '쌍용'이라고 쓰는 기업 이름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엄청난 수의 정리해고나 살인적인 진압이나 모두 대통령을 잘못 뽑은 업보라고 생각하며, '우리는 이렇게 당해도 싸!' 하는 자학적인 냉소가 그 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 전부터 그랬다. 2008년, 600년 숭례문이 하루 밤 사이에 소실된 것도, 미국산 쇠고기를 반대하는 100만 명의 촛불 집회도, 용산 참사도 모두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어찌 되겠지!' 하는 생각이 그냥 불안하게 출렁이고 있었다. 공지영 작가도 그랬던 모양이다.
이명박 정권이 처음 촛불집회 시위자들을 구속했을 때 '설마' 했지만, 이후 미네르바가 구속되면서 '어어!' 했지만, 드디어 아침 출근시간에 집을 잃고 항의하는 시민 다섯과 젊은 경찰 한 사람을 불태워 죽이는 것을 보고 '이제 생각보다 끔찍한 사회가 올지도 모른다.' 불길하게 직감했지만, 그래도 내가 가만히 있어도 사회가 다시 이성을 회복하겠거니 믿었다.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 21세기이고, 이미 언론자유가 있었고, 무엇보다 나는 이런 정치나 경제, 노동 체질이 아니며, 똑똑한 분들은 그 분야에 많이 있었다.(41쪽) 공지영은 그래서인지 쌍용자동차 사태에 쉽게 다가가지 못했고, 13번째 죽음과 그 죽음이 남긴 고아 남매의 소식을 트위터로 접한 뒤에야 비로소 처음 알게 된다. 그래도 긴가민가 했나보다. 대한문 농성장에 같이 있는 것이 부끄러웠다고 했다. 그러다가 영화 <두 개의 문> 시사회에서 용산참사와 쌍용자동차 다큐멘터리를 보고서 80년 오월 광주를 연상하였고, 22명의 안타까운 죽음을 접하고, 더 이상의 죽음 안 된다며, 쌍용자동차 사태를 깊숙이 들여다보면서, 비로소 노동자들과 따뜻하게 연대할 수 있었던 작가의 모습은, 그래서 더욱 소중한 진정성으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새삼 그들이 늘 청소를 하고, 그들이 늘 염치를 차리며, 내가 늘 밥값 내는 걸 힘들어 하던 게 생각났다. 그런 사람들이니 쇠파이프로 옛 동료들을 먼저 공격할 수 없었다는 것도 처음으로 이해했다. 노동자라는 게, 건강한 노동자들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그리고 내가 그들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111쪽)
공지영은 쌍용자동차에서 노동자들을 쫓아내는 행위를 '의자놀이'에 비유했다. 어릴 때의 놀이, 의자를 사람 수보다 하나 덜 놓고 노래를 부르며 빙글빙글 돌다가 노래가 멈추면 재빨리 의자에 앉는 놀이, 누군가 한 명은 반드시 튕겨나야 하는 놀이, 쌍용자동차는 의자를 사람 수의 반만 갖다놓고 그런 놀이를 시키는 것 같다고 말한다.
여러 번 밀쳐두었다가 다시 들고 힘들게 읽었지만, 공지영 작가가 보여준 쌍용자동차 사태의 그림은 의외로 간단했다. 노동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잘 나가던 쌍용자동차를 외국 자본에 헐값에 매각하기 위해, 정부 경제관료, 법원, 회계법인, 자본이 단합(?)하여 회계 조작을 통해, 정리해고를 단행하였고, 노동자들은 77일간의 점거 농성으로 이에 맞섰다는 것. 이에 경찰은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봉쇄 작전과 인간 사냥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하였고, 이로 인해 해고 노동자들은 외상 후 스트레스증후군에 심각하게 시달리면서 모두 22명이 삶의 끈을 놓았다.
도대체 현장 노동자의 43%에 해당하는 2646명이라니! 열 명도 아니고, 백 명도, 천 명도 아니고, 딸린 가족을 포함하면 만 명의 목숨들이 우리 사회에서 퇴출되었다. 그리고 22명이 죽음! 그 중 12명을 유서 한 장 없이 자살하게 한 쌍용자동차 사태! 공지영은 쌍용자동차 사태를 또 하나의 '도가니'로 규정하고 있다.
또 하나의 '도가니' 쌍용자동차 사태를 나는 '자화상'이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 시대의 일그러진 자화상 말이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우리 사는 세상이 만들어 놓은 자화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공지영이 르포 <의자놀이>에서 되새김질 하듯 물은 말, '대체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는 '대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로 수정되어야 한다. 쌍용자동차 사태를 치유하지 않고 우리 사회가 어찌 한 발자국이라도 나아갈 수 있을까?
나는 또 두려웠다. 우리는 모두 자본의 증식과 이득을 위해 소모되어야 하는 존재들인가? 세상을 쥐락펴락 하는 그들에게 22명의 죽음이란 그냥 숫자에 불과한 것인가? 꼭 그렇게 사람들을 몰아내고 조작하고 봉쇄하고 폭행하고 짓이겨야만 하는가? 그래야 승리하는 것인가? 그렇게 본때를 보여서 추구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 짓을 하고서 이익을 챙기는 그들은 과연 누구인가? 천 번 만 번 양보해도 나는 모르겠다. 사람의 목숨 위에 과연 무엇이 군림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쌍용자동자 노동자의 자살은 우리의 국가와 자본에 의해 작동하는 독특한 '구조적 폭력'이 만들어낸 '구조적 타살'로 규정되어야 한다.(151쪽)"아, 대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꽃잎에도 상처가 있다.너와 함께 걸었던 들길을 걸으며들길에 앉아 저녁놀을 바라보면상처 많은 풀잎들이 손을 흔든다.상처 많은 풀잎들이 가장 향기롭다.(157쪽, 정호승의 시)… 상처 받은 모든 분들에게 안식과 평온을!
의자놀이 - 공지영의 첫 르포르타주, 쌍용자동차 이야기
공지영 지음,
휴머니스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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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의 작은 대안고등학교에서 아이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시집 <느티나무 그늘 아래로>(내일을 여는 책), <너를 놓치다>(푸른사상사)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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