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조 등 무장공비 31명의 서울 침투를 보도한 중앙일보 기사(1968.1.22)
중앙일보 지면 캡쳐
1968년 1월 21일 발생한 '1·21사태'는 북한군이 권력의 최고 핵심부인 청와대 폭파와 대통령 암살을 임무로 했다는 점에서 당시 큰 충격을 던졌습니다. 분단 후 북한군이 휴전선 철책을 넘어 침투하는 경우가 잦았지만 그 목적은 대개 군사정보 염탐 및 군사시설 파괴였습니다. 그런데 북한군이 청와대 폭파를 목표로 청와대 뒷산까지 침투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김신조 등 무장간첩들은 북한의 '124군부대' 소속으로 알려졌습니다. 군 당국이 밝힌 바에 따르면, 이 부대는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으로 게릴라전에 대비한 특수훈련 부대로 알려졌습니다. 김신조 등 31명(33명이었다는 주장도 있음)은 한국군의 복장을 한 채 수류탄,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1월 18일 자정을 기해 군사분계선(DMZ)을 넘어 이후 야간을 이용해 서울로 향했습니다.
18일 오전 5시경, 경기도 파주군 법원리 뒷산에 도착한 이들은 잠시 휴식을 취하던 중 인근마을에서 나무하러 온 우성제씨 4형제와 마주쳤는데, 우씨 등은 한눈에 그들이 무장공비임을 알아차렸습니다. 공비들은 이들에게 지서의 위치와 문산, 동두천, 의정부로 가는 방향을 묻고는 그냥 돌려보내줬습니다. 우씨 형제는 신변의 위험 때문에 이튿날 오후 9시경에야 파주군 법원리 창현파출소에 '공비 출현' 신고를 했습니다.
우씨 형제들과 헤어진 공비들은 서울을 향해 급속 산악행군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모래주머니를 차고 산악구보를 하며 맹훈련을 한 '전사'들로 약 30kg의 중무장을 한 채 시간당 10km를 주파하는 괴력을 보였습니다. 이들은 법원리-미타산-앵무봉-노고산-진관사를 거쳐 청와대 뒷산인 북한산 비봉에 다다랐는데 그 때가 대략 20일 오전 6시경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군은 이들이 이 정도로 빨리 서울에 접근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우씨 형제들과 헤어진 곳을 기준으로 할 때 이들이 서울 진관외동 진관사까지 산악행군을 하려면 우리 해병대로도 적어도 이틀은 족히 걸릴 걸로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공비들은 중무장에 야간산행으로도 이틀만에 북한산까지 잠입한 것이었습니다.
이날 오후 2시경, 수도방위 부대인 6군단 예하의 3개 사단과 김재규 중장의 6관구 병력이 동원돼 전방에서부터 서울 외곽에 이르는 수십 겹의 방어선을 구축하였는데 무장공비들은 이미 이 지역을 통과한 뒤였습니다. 그 시각 김성은 국방부장관은 수색대로부터 경기도 송추유원지 부근에서 무장공비들의 것으로 보이는 실탄과 탄창, 음식물 찌꺼기 등이 발견됐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