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제주를 떠났지만, 힘내라 검은 새!

[작가, 제주와 연애하다 ①] 소설가 강기희

등록 2013.02.05 20:38수정 2013.02.08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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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해군기지가 미 해군 설계요구에 의해 미군 핵항모가 입항할 규모로 설계되고 있다는 사실이 2012년 9월, 장하나 국회의원에 의해 밝혀졌습니다. 모국어로 글을 쓰는 시인과 작가들은 제주해군기지 건설 후 대정, 세화 성산에 공군기지가, 산방산에 해병대가 들어선다는 소식을 들으며 제주도가 최전선화되는 것을 공포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쓰는 일 외에 별로 잘 하는 게 없는 시인과 소설가들은 편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서귀포 바람, 애월의 파도, 북촌의 눈물, 위미의 수평선, 쇠소깍의 고요를 생각하며, 두려움과 연민이 어룽진 손으로 제주도민들께 편지를 씁니다. <작가, 제주와 연애하다>입니다. [편집자말]
a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를 반대하는 주민들을 경찰이 강제 해산시키고 있다. < Jam Docu 강정>의 한 장면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를 반대하는 주민들을 경찰이 강제 해산시키고 있다. < Jam Docu 강정>의 한 장면 ⓒ 시네마달


그날 제주는 해무로 덮여있었고, 길은 보이지도 않았다. 차들은 엉금엉금 기었고 사람들은 유령처럼 떠다녔다.

관덕정 앞에서 널 처음 만났을 때 너는 내게 반갑다며 악수를 청하거나 포옹도 하지 않았다. 내가 싫어 그런 게 아니라 제주가 받은 상처가 너무 깊어 그런 거라고 했다.

너는 해무로 지워진 길을 내며 나를 4·3평화공원으로 이끌었다. 그곳에서 너는 죽어간 자들을 하나씩 호명했고 그때마다 또 다른 검은 새가 푸드덕 하늘을 날았다.

어둠이 내리고 해무는 사라졌다. 관광지도만 보아왔던 내게 너는 제주의 역사지도를 펼쳐 보였다. 그곳엔 제주가 겪은 침탈과 살육의 역사가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다.

일본제국주의가 다녀간 자리에 미국제국주의가 자릴 잡았고, 그 일은 지금도 진행 중이었다. 지난 100년 동안 일어난 일들이었고, 그것만으로도 지도는 빼곡했다.

"저 숱한 영령들이 구천을 떠돌고 있는데 제주가 평화의 섬? 웃기지 말라고 해!"

소줏잔을 기울이다 말고 검은 새 네가 소리쳤다. 그때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동의했다. 누구는 제주가 세계7대 자연경관에 뽑히길 기원하며 전화기를 돌렸고 누구는 강정의 다급함을 알리기 위해 트윗을 날리던 때였다.


누구는 강정에 해군기지가 들어서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거라며 설레발을 치고 있고 해군기지 건설을 막던 누군가는 닭장차에 실려 가던 때였다. 그랬다.

술을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나는 숨이 막혀왔고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4·3 영령들이 내 목을 조이는 것 같았고, 경찰의 방패날이 내 머리통을 둘로 쪼개는 것만 같았다. 그 밤 제주는 내게 고립의 섬이고 피의 섬이고 살육의 섬이었다.


비명 같은 신음을 내고 있을 때 검은 새 너는 이덕구 아니 이재수나 김통정이 그랬을 법한 표정으로 어둠에 잠긴 제주를 노려보고 있었다. 고통을 견디지 못한 나는 비틀거리며 건물을 빠져나왔고 급기야 그 밤 제주를 떠나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제주를 떠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불면의 밤을 보낸 나는 다음 날 제주를 떠나 육지로 돌아온 후에야 비로소 고른 숨을 쉴 수 있었다. 그 때문에 나는 검은 새 너에게 지금껏 미안하다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네가 전해준 숨찬 소식을 들을 때마다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리하지 못했다.

검은 새, 함께 하지 못해 미안했다. 그러나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일은 내가 사는 강원도 산 속 마을 사람들도 찬동하는 일이니 상심하지 말자. 악의 협동이 아무리 견고해도 역사는 민중의 힘으로 바꾼다는 점 또한 잊지 말자. 힘내라 검은 새!

a  제주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반대 투쟁을 담은 영화 <잼다큐강정>

제주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반대 투쟁을 담은 영화 <잼다큐강정> ⓒ 시네마달


덧붙이는 글 강기희 / 강원도 정선에서 태어나 강원대학교 무역학과를 졸업. 1998년 『문학21』신인상으로 등단, 장편소설 『아담과 아담 이브와 이브』(1999) 『동강에는 쉬리가 있다』(1999) 『은옥이1,2』(2001) 『도둑고양이』(실천문학사,2001) 『개 같은 인생들』(2006) 『연산』 (2012) 등을 출간했다. 한국 최초 전자책 전문업체인 '바로북닷컴'이 주최한 '5천만원 고료 제1회 디지털문학대상'을 수상. 정선의 '붉은 숲'에서 창작에 전념하고 있다.
#제주 해군기지 #강정마을 #작가, 제주와 연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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