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주의자를 자처하는 당신께 권합니다

[서평] 김도훈외 5인이 쓴 <보수주의자의 삶과 죽음>

등록 2013.03.08 11:36수정 2013.03.08 11:36
0
원고료로 응원
a  <보수주의자의 삶과 죽음> 겉표지

<보수주의자의 삶과 죽음> 겉표지 ⓒ 김병현


우리나라에서 보수주의는 무엇을 의미할까. 학자들조차 이 물음에는 명확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아직 보수주의에 대해 통일된 의견도 존재하지 않고 정치적 전통에서도 충분한 역사적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지 '보수세력이라고 불리는 정치집단은 존재하되 그러한 집단의 정체성을 이루는 보수주의의 이념은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지적할 뿐이다. 이런 경향은 진보주의에서도 마찬가지다.

상보적인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보수와 진보 간의 건전한 이념적 경쟁과 대립이 아니라 상대를 억누르고 비방하는 가운데 보수와 진보는 모두 빈약한 토대만을 지니게 된 것이다. 예컨대, 한국사회에서 보수와 진보의 갈등구조와 담론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토론 속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고, 상대방을 수구, 좌익, 진보, 혁신, 개혁, 보수, 우익, 극우 등과 같은 개념이나 용도도 모르는 용어들을 사용해 몰아붙임으로써 반사이익을 챙기고자 하는 의도가 강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주변에서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누군가는 당파적인 이유로, 누군가는 진보주의가 싫어서, 그 이유도 다양하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을 듣고 있노라면 결국 자신의 희망을 피력하고 있을 뿐이다. 진보나 보수주의에 대한 정확한 개념도 이해하지 못한 채 이념적 색채와 편가르기에 사로잡혀 싸움만 일삼고 있다. 꼭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는 그릇된 망령이 우리 사회를 집어삼키고 있다.

그렇다고 나 같은 장삼이사가 한국의 보수주의를 정의할 생각은 추호도 없거니와, 그럴 능력도 없다. 다만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는 당신들에게 '자신의 생각과 실천이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혼자보다는 모두를 위해 행동했다는 점에서, 신념을 저버리지 않고 온몸으로 저항하며 비굴하게 살아가지 않았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 여섯 인물을 진정한 보수주의자가 아닐까라는 믿음을 가지고 <보수주의자의 삶과 죽음>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선택의 순간에 누군가가 먼저 걸어가야 한다면 가장 먼저 앞장서 나갔던 이들을 통해 진정한 보수의 양심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식민지 기독교 민족주의자에서 해방 후 반공을 넘어선 민주통일의 투사로 살았던 장준하,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으로 한국 보수주의의 모범을 세운 김병로, 민족의 근심을 함께 한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전형 이회영, 망국을 접하고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기만 하구나"라는 절명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황현, 전통 양반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민초들과 함께 했던 유형원,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한 구국의 장수 최영. 이들의 행적을 통해 이 시대가 원하는 보수주의의 모습은 어떤 것이며 지도층의 의무가 무엇인지 느껴보자.

자신의 생각과 실천이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를 비판해 '민족적 민주주의'의 장례식을 치른 대학생들에게 법원이 영장을 기각하자, 공수부대원들이 총기로 무장한 채 법원에 난입한 사건이 있었다. 이어 박정희는 현 정국의 불안을 일부 정치인과 언론의 선동 때문으로 돌렸고, 이를 두고 한 신문사가 '정국 불안이 선동 때문인가'라는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 토론회에 참석한 장준하는 준열한 구두연설을 통해 박정희를 비판했다. 공수부대원이 사법부에 총기를 들이밀고 협박하는 상황에서 말이다.


"대통령 박정희씨여! 나라의 이 몰골이 된 것을 언론인들에게까지 그 책임을 묻습니까. 사실 당신에게 가혹한 채찍질을 가하지 못 한 책임은 져야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런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여보시오. 접대부의 치맛자락 같은 붓 끝을 휘둘려가며 당신을 도와, 당신을 대통령으로 만든 것이 한국의 언론이 아니겠소. 고마운 줄이나 아시오!" (본문 21쪽)

장준하는 일제강점기에 우익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아 해방 후에도 그 이상을 지키고 실천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이승만 정권 시절에는 감시자 구실을 자임하다가,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스스로 돌베개를 벤 민족주의자가 됐다. 독재에 맞서 정권과 대립각을 세워가던 그는 함석헌·백낙준·유진오 등 재야인사 30명의 명의로 된 개헌 청원 백만 인 서명 운동을 벌였다.


이 개헌 서명 운동을 이유로 그는 긴급조치 1호의 최초 위반자로 비상군법회의 법정에서 최고형 15년, 자격정지 15년형을 선고받았다. 1년여의 수감생활을 겪은 후, 형집행 정지를 받고 출감하지만, 곧 민주헌법의 발의를 촉구하는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을 발표한다. 이듬해 1975년에는 민주회복과 개헌운동을 위한 범야당단일화를 추진했지만 등산길에 나선 8월에 의문사를 당하고 말았다.

혼자보다는 모두를 위해 행동했다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가 한 신문에 밝힌 변호사가 되려고 했던 동기는 지금 이 시대의 법조인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원래 내가 변호사 자격을 얻고자 했던 것은 생활 직업에 충실한 것이 아니요, 재산을 축적한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며, 다만 일제의 박해를 받아 비참한 질곡에 신음하는 동포를 위하여 도움이 될 수 있는 행동을 하려함에 있었다. (중략) 뿐만 아니라 나는 생각하기를, 변호사라는 직무가 자기의 생활 직업으로만 하지 아니한다면 인권 옹호와 사회 방위에 실로 위대한 사업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본문 77쪽)

또한 그는 지독하리만치 스스로에게 엄격했다. 강직한 책임감에서 우러나오는 청렴성은 여러 가지 일화를 남겼다. 일제치하에서 독립 운동가들을 변론하던 시절, 더 이상 일제에 협력하지 않고는 이전처럼 살아가기가 어려워지자 미련없이 모든 것을 버리고 농촌으로 내려가 가축을 기르며 농사를 지었다. 대법원장 시절에도 예산을 아끼기 위해 집무실에 난로를 놓지 않았고, 10년 동안 결제도장이 반 토막이 나도록 교체를 하지 않았다. 이런 솔선수범은 그에게 엄청난 권위를 부여해줬다.

사실 진정한 권위란 무력이나 외형적인 힘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행동에 책임질 줄 아는 지도자의 솔선수범만이 진정한 권위를 만들어 낸다. 과거에 권위주의가 오랫동안 지속되었음에도 한국에서 존경받는 지도자를 찾기 힘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신념을 저버리지 않고 온몸으로 저항하며 비굴하게 살아가지 않았다

또한 책에 실린 이들의 공통점은 스스로 믿는 신념에 따라 행동했다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목숨을 버려야만 하는 일이라도 말이다. 순수한 정신문명의 토대에서 자존심과 명분을 행동에 투영시켰다. 유형원이 남긴 <유자제서>를 보자. 그는 여기서 1910년 8월 29일 한국이 일본에 병합된다는 내용의 교서를 접하고 일종의 유언이라고 할 수 있는 소회를 담았다.

"내가 가희 죽어 의(義)를 지켜야 할 까닭은 없으나, 다만 국가에서 선비를 키워 온 지 500년에 나라가 망하는 날을 당하여 한 사람도 책임을 지고 죽는 사람이 없다. 어찌 가슴이 아프지 아니한가? 나는 위로 황천에서 받은 올바른 마음씨를 저버린 적이 없고 아래로는 평생 읽던 좋은 글을 저버리지 아니하려 길이 잠들려 하니 통쾌하지 아니한가? 너희들은 내가 죽는 것을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라." (본문 159쪽)

그는 자신이 국가를 위해 죽어야 할 하등의 이유나 의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공직에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특별한 애국심을 가질 만한 배경도 없었다. 단지 '선비'로서의 소명을 다하기 위해, '올바른 마음씨와 좋은 글에서 얻은 가르침'에 따라 행동했던 것이다. 그보다 5년 앞서 망국을 개탄하며 자결했던 시종무관장 민영환과는 구별되는 부분이다.

혹자는 이들이 보수주의자가 아니라는 평가를 내리며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앞서 적었듯이 우리나라에서는 학자들조차 명확히 진보와 보수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에게서 보수의 가치를 느껴보자는 것이다.

또한 설령 이들이 보수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스스로에게 당당하고자 했던 사람들에게 진보냐, 보수냐 하는 흑백논리를 들이대지 않아야 한다. 적어도 이 책에 실린 이들은 자신들의 위치에서 스스로의 신념을 지키며 역사 앞에 떳떳이 살았다. 이 책의 의도 또한 보수주의를 무조건적으로 비판하려한다고 곡해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오히려 서문에서 보수가 희망이 되기를 응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여 이념의 경직성에서 해방되고, 경제적 민주화를 실현하고, 통일 민족주의를 성장시키며, 지식인들이 도덕성을 갖추고, 시민운동과 국가경영 방식이 제 자리를 잡는다면 우리의 미래, 우리의 역사는 희망적이다. 그러나 이 희망과 꿈을 실현하지 않는다면 역사도 미래도 없다. 부디 진정한 보수가 역사의 희망이 될 수 있기를 빌어본다."(본문 14쪽)
덧붙이는 글 <보수주의자의 삶과 죽음>, 김도훈외 5인(사람으로 읽는 한국사 기획위원회) 지음, 도서출판 동녘 펴냄, 13,000원

보수주의자의 삶과 죽음 - 우리가 몰랐던 한국 역사 속 참된 보수주의자들

사람으로 읽는 한국사 기획위원회 엮음,
동녘, 2010


#보수주의자의 삶과 죽음 #사람으로 읽는 한국사 기획위원회 #도서출판 동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김건희·채상병특검법 부결, 여당 4표 이탈 '균열' 김건희·채상병특검법 부결,  여당 4표 이탈 '균열'
  2. 2 한국만 둔감하다...포스코 떠나는 해외 투자기관들 한국만 둔감하다...포스코 떠나는 해외 투자기관들
  3. 3 [이충재 칼럼] 윤 대통령, 너무 겁이 없다 [이충재 칼럼] 윤 대통령, 너무 겁이 없다
  4. 4 "KBS 풀어주고 이재명 쪽으로" 위증교사 마지막 재판의 녹음파일 "KBS 풀어주고 이재명 쪽으로" 위증교사 마지막 재판의 녹음파일
  5. 5 "이러다 임오군란 일어나겠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대통령 "이러다 임오군란 일어나겠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대통령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