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님, 4·3 추모사 기대해도 될까요?

올바른 규명과 반성, 책임·용서 없으면 역사는 반복될 뿐

등록 2013.03.29 18:47수정 2013.03.29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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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 한 장면
영화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 한 장면자파리필름

"저 여자도 폭도입니까?" - 영화 <지슬>에서 잡혀온 순덕이를 강간하는 김 상사를 보며 박 일병이 했던 말

"기상천외하게도 그것은 왜정 때 만들어진 경찰기록이었다. 칠팔 년 전 왜놈 조합서기들과 맞서 싸우다가 이십일 구류 산 것이 기록에 올라 남편과 한통속의 사상불온자로 점 찍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그녀의 죄였다. 일제에 의해 낙인찍힌 해방된 땅에서도 여전히 불온분자였다.(중략) 그날 저녁 무렵, 바닷가 눈 덮인 모래밭에서 간난이를 포함한 여덟명의 우묵개 사람들이 일제히 불 뿜는 총구 앞에서 쓰려졌다." - 현기영 <마지막 테우리)(1994, 창작과 비평)

학교에 책을 두고 왔다던 순덕이. 총구를 마주한 그 눈빛 쉽게 잊히지 않는다. 김 상사, 고 중사에게 차례로 강간당하며 죽어가던 영화 속 주인공 순덕이. 그런 제주 여자, 또 다른 순덕이를 만난 건 오래 전 현기영의 소설 <마지막 테우리>에서다.

또 다른 순덕이, 그러니까 소설 속 간난이는 지독한 배고픔과 노동 때문에 두 아이를 가슴에 묻어야 했다. 또 남편마저 군인들에게 끌려가기 전 스스로 동맥을 끊어 삶을 놔버린다. 참 비참한 가족사다. 결국 간난이도 마지막으로 낳은 젖먹이를 시어머니에게 안겨주고 한밤에 끌려 나가 해변에서 죽어간다. 책에서 만난 간난이와 영화 속 순덕이는 제주 4·3사건의 단면을 잘 보여주는 상징적인 존재들이다. 가상의 인물들이지만, 그들도 65년 전 죽어간 제주 3만 희생자들 중 한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65년 전 남쪽 섬 제주에서 벌어진 비극

영화 <지슬>에는 산으로 피신할 수 없어 집에 남아 있던 늙은 어머니가 나온다. 늙은 어머니가 군인들에게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양식이 있었다. 어머니와 함께 불탄 집에서, 익은 채로 나뒹굴던 지슬(감자). 어머니 시신도 채 수습하지 못한 아들은 불탄 감자를 주워 담아 동네 사람들이 숨어 있는 동굴로 가서 펼쳐 놓는다. 동네 사람들은 그 감자를 허겁지겁 받아 들고 주린 배를 채운다. 임신을 해 몸이 무거운 아내가 묻는다. "혼자 계신 어머니는 괜찮으셔?" 아들은 아내의 눈길을 외면한 채 외마디 대답을 신음처럼 내뱉는다. "응!"

흑백의 역사. 영화 <지슬>은 65년 전 남쪽 섬 제주의 한 마을에서 벌어진 비극을 그리고 있다. 돼지가 굶는 것이 무엇보다 걱정인 노인과 장가 갈 꿈을 꾸던 청년. 그들은 군인들의 공격에 동굴에 갇혀 매운 고추를 태우며 저항하다 죽어갔다. '빨갱이'라고 불리던 그 사람들은 진위여부에 관계없이 오랜 세월 동안 빨갱이로 남았다. 그들의 시신은 육탈되고 뼈만 앙상하게 남아 세월의 먼지를 뒤집어쓰고 동굴에 갇혀 지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우리는 오늘, 58년 전 분단과 냉전이 불러온 불행한 역사 속에서 무고하게 희생당한 분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이 자리에 함께 했습니다. (중략) 아울러 무력충돌과 진압의 과정에서 국가권력이 불법하게 행사되었던 잘못에 대해 제주도민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중략) 국가권력은 어떠한 경우에도 합법적으로 행사되어야 하고, 일탈에 대한 책임은 무겁게 다뤄져야 합니다. 또한 용서와 화해를 말하기 전에 억울하게 고통 받은 분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명예를 회복시켜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국가가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입니다." - 58주년 4·3위령제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추모사 중

 영화 <지슬>의 한 장면
영화 <지슬>의 한 장면지파리 필름

그들은 '빨갱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58년을 기다렸다


4·3 사건이 '빨갱이 소탕 작전'에서 '국가권력의 불법 사용에 의한 무고한 양민 학살'로 바뀌기까지 무려 58년이 필요했다. 그동안 진보 진영과 민간 차원에서 이루어지던 진상규명 요구를 받아 안은 것은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이었다.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고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설치된 후 3년만인 2003년, 사건 발생 55년 만에 정부차원의 진상보고서가 채택된다.

진상규명위는 제주도민 및 피해자에 대한 정부의 사과와 추모기념일 지정, 4·3평화공원 조성 등 7대 건의안을 제출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드디어 2003년 10월 국가 차원에서 공식 사과했다. 노 전 대통령은 2006년 4월 3일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4·3 위령제에 참석해 추도사를 하게 된다. 제주 도민과 유가족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손을 잡으며 눈물을 흘렸다.

이후 4·3사건에 대한  명예회복과 거기에 걸맞은 대우가 이어질 줄 알았다. 이명박 대통령은 후보 시절, 제주 첫 방문지로 4·3평화공원을 택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한나라당이 집권하더라도 역사적 사건에 대한 평가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이 공약을 뒤집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7대 대통령 인수위에서 4·3위원회 등 과거사 위원회 폐지를 거론한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2008년은 4·3사건이 60년을 맞는 해였다. 당연히 위령제 또한 뜻깊은 자리였다. 제주도와 정치권, 시민단체들은 '대통령이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은 이념 논쟁을 불러올 우려가 있다는 이유를 불참하기 시작해 임기 5년 내내 단 한 번도 위령제에 참석하지 않았다. 61주년 기념식에는 제주 4·3 위원회 위원장인 한승수 총리마저 서울모터쇼 참석을 이유로 불참해 논란이 일었다. 대통령과 총리의 이 같은 행보는노무현 정권하에서 이루어진 진상보고서 뒤집으려는 의도와 무관치 않다.

2008년 구 한나라당 임해규 의원은 MBC 라디오에 출연해 "남로당 계열 등 좌익이 제주도에서 경찰들을 습격함으로써 남한의 단독정부수립과 이후의 일련의 과정에 대한 저항의 성격으로 게릴라전을 했던 것이 역사의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또 참여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던 김장수 전 한나라당 의원은 2008년 9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국방부가 4·3사건에 대한 평가가 좌익 성향 위주로 돼 있다는 판단에 따라 국무총리 소속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에 객관적인 평가가 이뤄졌으면 좋겠다는 취지의 공문을 올해 초 보낸 바 있다"고 밝혀 논란을 빚기도 했다. 여기에 이상희 전 국방부장관은
2008년 10월 열린 국정감사에서 "제주4·3사건은 남로당의 사주를 받은 무장폭동 사건"이라고 말해 4·3 유족회 등에 극한 거센 반발을 부르기도 했다.

노무현의 대통합과 박근혜의 대통합

 박근혜 대통령. 사진은 지난 4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에서 정부조직개편안 처리가 늦어지는 것에 대해 대국민담화를 발표하고 있는 모습.
박근혜 대통령. 사진은 지난 4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에서 정부조직개편안 처리가 늦어지는 것에 대해 대국민담화를 발표하고 있는 모습.권우성

올해는 박근혜 정부 첫 해 그리고 4·3항쟁이 65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제주 4·3 유족회 단체 등에서 박근혜 대통령에게 4·3 위령제에 반드시 참석해달라고 요청했단다. 참석 여부야 대통령이 판단할 일이지만 대통령의 참석이 이념 논쟁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어쭙잖은 이명박 대통령의 역사관을 답습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념 논쟁을 핑계로 아직 규명되지 못한 역사를 묻어 두는 것은 국가의 또 다른 폭력일 뿐이다.

올바른 규명과 반성, 책임과 용서가 없으면 역사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4·19의 참극이나 5·18의 참상 또한 바로잡지 못한 역사의 연장선상에 있다. 어두운 스크린에서 울려 퍼지는 총성, 죽어나가던 마을 사람들의 절규…. 부담스럽고 힘들더라도 박근혜 대통령과 많은 정치인들이 영화 <지슬>을 보셨으면 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말했던 대통합이나 박근혜 대통령이 국민에게 약속했던 대통합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4·3 위령제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의 내 바람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4·3 위령제 추모사를 들을 수 있으면 더욱 좋을 것이다.

"누구를 벌하고 무엇을 빼앗자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사실대로 분명히 밝히고, 억울한 누명과 맺힌 한을 풀어주고,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다짐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한 화해와 용서를 통해 통합의 길로 나갈 수 있습니다." - 4·3위령제 58주년 기념식 당시 노무현 대통령 추모사 중
#지슬 #4.3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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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진보는 냉철한 시민의식을 필요로 합니다. 찌라시 보다 못한 언론이 훗날 역사가 되지 않으려면 모두가 스스로의 기록자가 되어야 합니다. 글은 내가 할 수 있는 저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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