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프란치스코 교회 공터주황색 푯대와 잔디공터가 옛 교회의 역사를 말해준다.
최서우
결국 이 교회는 1987년 동독정부에 의해 철거되는 운명을 맞는다. 교회역사가 100여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장벽을 더 강화시키기 위해 취한 조치였다. 즉 동독 공산주의 정권의 경우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았다는 것이 이 교회를 통해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교회가 정권에 의해 무참히 파괴되는 모습을 본 이곳 주민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지켜주지 못해 너무나 미안했을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회뿐만 아니라 장벽 건축으로 인해 역사적 시설이 많이 파괴된 것은 사실이다. 정치적 대립으로 인해 조상들의 소중한 유산들이 방치되고 파괴되어간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철마는 장벽시대에도 달렸다
교회 터를 나서고 조금 걸어가다 보면 철도가 나온다. 암스테르담으로 향하는 철로인데, 우리나라 역사를 살펴보자면 헤이그 특사(이준, 이상설, 이위종)들이 1907년에 만국평화회의를 참석하기 위해 지나갔던 곳이기도 하다. 혹시 독자분들 중에 이런 질문을 하실 수도 있을 것이다. 장벽시대에 서베를린에서 동독으로 가는 철도는 끊겨 있었나요?
우리나라와는 달리 철마는 장벽시대에도 달리고 있었다. 지난번에 설명한 고속도로 검문소처럼 서베를린이나 서독 주민이 국경근처 역에 도착하면 동독 경찰이 열차에서 신분증을 체크하게 된다. 만약 동독 지역에 머무르지 않고 서독으로 바로 가는 경우라면, 통행료와 신분증만 지참하면 자유롭게 갈 수 있었다.
동독 지역으로 가는 경우 지난 번 고속도로 편에서 설명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비자를 미리 받은 후 지정될 기일 내까지 머무를 수 있었다. 반면 동독주민들에게 서독여행은 매우 까다로웠던 것이 사실이다. 실제 서베를린에서 사셨던 분들의 증언에 의하면, 국경을 통과할 때 플랫폼에 서 있는 동독 군인들과 군견을 흔히 볼 수 있었다고 하셨고, 경계가 매우 삼엄했다고 언급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