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명이 죽었다지금까지 가습기살균제로 인해 사망한 피해자는 112명에 이르는 실정이지만 여전히 정부는 피해자 대책 마련을 하지 않고 있다. 사진은 지난 3월 서울 광화문광장 내 해치마당에서 진행된 가습기살균제 피해사진 전시회 모습.
이기태
영유아, 아동, 임신부, 노인 등 112명의 목숨을 앗아간 가습기살균제 사태. 겨우 목숨을 건진 피해자들과 환경단체들이 만 2년이 되도록 피해자 대책을 마련하라고 목소리를 외치고 있지만 지금까지 정부가 내놓은 피해자 대책은 전혀 없다. 복지부, 환경부 등 정부부처가 서로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태가 이렇자 뒤늦게 국회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대책 마련을 위한 방안 찾기에 나섰다. 여·야도 한 목소리로 정부부처 간 떠넘기기식의 무책임한 태도에 대해 비판하며 원만한 해결을 촉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여전히 이렇다 할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정부 대책이 늦어질수록 피해자들의 고통은 가중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꼬여버린 가습기살균제 사태의 현황을 짚어봤다.
국회,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대책 마련 추진국회 보건복지위원회는 지난 18일 전체회의를 열고 진보정의당 심상정 의원 등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의원들을 중심으로 여야의원 27명이 발의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구제를 위한 결의안'을 가결, 본회의로 넘겼다.
이 결의안에는 가습기살균제 문제를 국무총리실에서 총괄하도록 하는 내용이 담겼다. 또 환경부가 타부서와 협력해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구제방안과 예산집행 계획안을 재난지역에 준해 마련토록 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아울러 보건복지부 질병관리본부에 접수된 피해자 중 중증환자와 사망자 가운데 생계가 곤란한 피해자들을 우선 지원하도록 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구제 의무를 정부에 부여하는 내용의 법안도 국회에 제출됐다.
민주통합당 장하나 의원 등 야당의원 21명은 지난 18일 피해자 구제·지원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환경부 소속의 가습기살균제 피해대책위원회를 둔다는 내용의 '가습기살균제의 흡입독성 화학물질에 의한 피해 구제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다.
이 법률안은 또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를 구제하기 위해 요양급여, 요양생활수당, 유족급여 및 장의비, 특별유족조위금 및 특별장의비 등 구제급여를 지급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외에도 환경부장관으로 하여금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기금을 설치하고 산하에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심사위원회 및 피해구제재심사위원회를 두는 내용도 포함했다.
정부부처는 서로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
장하나 의원이 질병관리본부로부터 입수한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폐손상 의심사례 접수현황'에 따르면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피해자 총 357명(미확인 31명 포함) 중 112명이 사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중 7세 미만 영유아는 134명(37%), 20~30대 82명(23%)으로 전체 피해자의 60%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112명(미확인 10명 포함)의 사망자 중 7세 미만의 영유아가 64명으로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중 중증환자들은 1억 9000만원에 달하는 폐이식수술과 매달 350여만 원의 천문학적 치료비를 부담하고 있다. 하지만 가습기살균제 피해가 발생한지 올해로 3년째이지만 정부와 가해기업은 이렇다 할 대책이나 사과조차 없는 상황이다. 특히 피해자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할 각 정부부처들은 서로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보건복지부 산하 질병관리본부는 지난해 말 가습기살균제가 원인미상의 중증폐질환 원인으로 지목된 지 1년이 훌쩍 넘어서야 가습기살균제 피해 진상규명을 위한 폐손상조사위원회를 꾸리고, 가습기살균제 피해 의심사례로 접수된 사례들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조사는 불가하게 됐다. 질병관리본부 측 관계자를 제외한 나머지 위원 24명 전원이 지난 4일 조사위원회를 일괄 사퇴하겠다는 뜻을 밝혔기 때문. 질병관리본부와 조사위원들이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를 대상으로 폐섬유화 증상을 면밀히 조사하기 위해 폐CT검사 등의 후속 조사를 벌이겠다는 뜻을 전했지만, 복지부는 화학물질에 따른 건강영향조사는 환경부 소관이라 조사할 법적 근거가 없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2011년 원인 모를 폐손상이 발생한 당시엔 감염병인 줄 알고 역학조사를 실시했지만, 화학물질로 인한 피해로 규명된 이상 조사 지원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
환경부도 책임을 회피하긴 마찬가지다. 지난해 11월 28일 환경부는 환경보건위원회를 열고 가습기살균제 피해를 환경성 질환으로 지정할지 여부를 심의했지만, 위원 대부분의 반대에 따라 환경성질환 지정은 물거품됐다. 환경성질환으로 지정되면 석면으로 인한 폐질환과 같이 피해 배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었다. 하지만 환경보건위원회는 가습기살균제 피해가 대기, 수질, 폐기물, 토양 등의 환경을 매개로 오염되고 이뤄지는 질환이 아니기 때문에 환경성 질환으로 지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질환을 환경성질환으로 지정하기 않기로 했다.
특히 환경부는 가습기살균제에 포함된 CMIT, MIT 성분을 지난해 9월 환경부 지정 유독물질로 등록했으면서 이 사실을 복지부에 따로 알리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미 질병관리본부는 지난해 2월 보도자료를 통해 CMIT, MIT 성분 제품에는 폐섬유화 소견이 발견되지 않았다며 환경부와 상반된 입장을 낸 바 있다. 복지부와 환경부의 입장이 엇갈리면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을 혼란시킴은 물론, 피해자 구제에 나서야 할 정부부처가 오히려 문제를 축소하려 했던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올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