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도시오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 전 회장
심규상
다다미방으로 들어섰다. 방안은 명성황후 연구실이다. 바닥에는 명성황후 관련 탁본 자료가 널려있다. 벽에는 '명성황후'와 일본인 이름을 새긴 자료가 붙어있다. 책상 위에도 명성황후 자료가 쌓여있다.
일본 구슈 구마모토현 아소산 기슭에 사는 가이 도시오(甲斐利雄·84)씨 집을 찾은 것은 지난 21일 저녁 무렵이다. 그는 한국인 방문객을 보고 맨발로 뛰어 나왔다. 환하게 웃으며 끌어안았다.
그를 처음 만난 때는 지난 2004년 5월이다. 그는 중학교 교사를 은퇴한 직후부터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구마모토 지역 관련자를 찾는 일에 몰두해 있었다.
"1997년경 우연히 만난 한국인소녀가 나를 명성황후와 연결시켜 새로운 삶으로 이끌었다. 그 소녀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처음 알려줬다. 만나고 싶지만 이름도 알지 못한다. 그때부터 명성황후에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됐다.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도 만들었다."모임의 회장을 맡은 당시 그는 기자를 처음 만나 "죽는 날까지 명성황후 시해범을 추적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꼬박 9년의 시간이 흘렸다. 그동안 그는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명성황후 사건과 관련한 굵직한 성과를 남겼다.
가이씨는 명성황후 시해에 적극 가담한 한 범죄자 후손을 찾아 참배를 제안했다. 그의 제안에 가와노 다쓰미(河野龍巳)씨가 호응했다. 가와노씨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공모하고 사건 당일 직접 왕궁을 쳐들어간 구니토모 시게아키(1861-1909)의 외손자다.
2005년 당시 84세인 가와노씨는 조부를 대신해 경기도 남양주 홍릉을 찾아 명성황후 묘소에 무릎을 꿇었다. 사죄의 절을 올렸다. 참회를 눈물을 흘렸다. 시해사건 후 110년만의 일이었다. 가와노씨의 역사 인식과 정수웅 감독(당시 다큐서울 대표)의 중재 등 역할에 기인한 것이었지만 가이씨가 없었다면 애당초 가능하지 않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