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연산군묘(왼쪽). 오른쪽은 부인 신씨의 무덤.
김종성
1498년에 문제가 된 김종직의 문건은 '의제의 죽음을 슬퍼하는(弔) 글'이란 뜻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다. 이것은 진나라와 한나라가 교체되던 과도기에 초나라 왕의 타이틀을 갖고 반(反)진나라 진영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의제(회왕)가 신하인 항우에게 죽임을 당한 사실을 슬퍼하는 내용이다. 이 글을 쓴 시점은 세조 수양대군이 집권한 지 3년 뒤인 1458년이고, 당시 김종직은 스물여덟 살의 과거 수험생이었다.
연산군과 훈구파는 40년 전에 과거 수험생 김종직의 손에서 생산된 이 문건을 근거로 김종직과 사림파를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붙였다. 그들은 '의제는 단종을 상징하고 항우는 세조를 상징한다'고 일방적으로 해석한 뒤, 연산군의 증조부인 세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은 연산군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반국가 행위라는 논리를 전개했다.
그런데 주군을 배신한 신하를 혐오하는 태도는 거의 모든 선비의 글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선비에게 충효를 가르치는 나라에서, 선비가 항우 같은 사람을 혐오하는 글을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김종직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할 목적으로 조의제문을 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의도는 글에 명확히 나타나지 않는다.
게다가 당시의 김종직은 제1단계 과거시험인 소과에 급제한 상태에서 대과를 준비하는 수험생에 불과했다. 수험생이 쓴 글에 정치적 의도가 담긴들 얼마나 담길 수 있을까. 그가 어떤 의도로 글을 썼든지 간에 정치적 의도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상황에서, 연산군과 훈구파가 김종직과 사림파를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붙인 것은 매우 억지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이 억지나 다름없는 일이 엄청난 재앙을 낳았다. 연산군과 훈구파는 이미 죽은 김종직의 시신을 꺼내 부관참시를 감행하고 신진세력인 사림파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 이로 인해 개혁파 선비들이 대거 목숨을 잃었고 사림파의 활동은 상당 부분 침체될 수밖에 없었다.
훈구파에게 당한 연산군의 말로 연산군과 훈구파가 사초에 적힌 김종직의 문장을 빌미로 공안정국을 조성한 본질적 의도는 신진세력인 사림파의 정치적 진출을 견제하는 데 있었다. 개혁을 요구하는 사림파의 정치공세로부터 구체제를 사수하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조선왕조 건국 이래 약 100년간 경제적·학술적·사회적 능력을 구축한 지방의 사림파는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시대(1470~1494년)에 중앙정계에 대거 진출했다. 이들은 성종시대에 사헌부·사간원·홍문관·춘추관 같은 기관들을 주로 장악했다.
사법기관 또는 언론기관 혹은 학술기관에 포진한 이들은 이·호·예·병·형·공조 같은 일반 행정기관을 장악한 훈구파를 압박하면서 구체제의 개혁을 추구했다. 이들은 원칙과 시스템에 근거한 정치체제를 만들어야 조선사회가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훈구파가 연산군과 함께 무오사화를 일으킨 것은 경제력과 실력을 바탕으로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에 대한 두려움과 초조함이 낳은 결과였다.
연산군이 무오사화를 일으킨 것도 비슷한 동기 때문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13명의 자녀를 낳고 정종이 26명의 자녀를 낳고 태종이 30명의 자녀를 낳고 세종이 24명의 자녀를 낳은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 전기의 왕들은 유난히 자녀가 많았다. 딸과 아들의 상속분이 똑같았기 때문에 공주나 왕자가 결혼할 때마다 왕실은 많은 토지를 떼어줘야 했다.
이로 인해 왕실 소유의 토지가 크게 줄어든 상황에서 성종 때는 세금마저 제대로 걷히지 않았다. 성종 때는 거의 모든 농경지가 흉년을 겨우 모면한 정도로만 보고되었다. 세금 납부를 피할 목적으로 지주들이 '종합소득세'를 허위로 신고했던 것이다. 그러니 세수가 줄어들고 왕의 경제적 기반도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