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개혁, 최소한 이 정도는 하자

[주장] 노무현의 순진한 믿음... 국정원, 아직 겁난다

등록 2013.07.24 10:22수정 2013.07.27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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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스노든의 폭로로 미국 국가 안보국(NSA)의 정보수집 도구 프리즘(PRISM)의 존재가 알려지자 세계 각국의 비난이 잇따르고 있다. 인터넷 기업들로부터 개인정보를 넘겨받아 수천만 건이나 열람했다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런데 미국 국내 반응은 의외로 담담하다. 테러 방지를 위해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는 여론 때문이다. '테러 조사를 위한 전화기록 추적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의견이 56%를 넘은 최근 미국인의 설문조사 결과는 9·11 테러 이후 테러 방지를 위해 정보기관의 사생활 침해를 관대하게 바라보는 인식을 보여준다. 정보기관과 이를 감시하는 의회와 사법부에 대한 미국인들의 신뢰도 설문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우리 정보기관은 국민들로부터 어느 정도의 신뢰를 받고 있는가. 국정원은 이름은 바뀌었다 해도 군사정권 시절부터 정권을 위해 힘써 일했던 어두운 역사가 있다. 국민과 국익을 위한 '국가안보'보다는 정권의 이익을 앞세운 '정권안보'에 충실했던 정보기관의 잔상은 아직 국민의 뇌리에서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벌어진 대선 댓글공작 논란은 국정원의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의혹을 증폭시켰고, 이어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로 정쟁의 중심에 나서면서 정권의 하수인 이미지를 다시금 떠오르게 했다.

사실 우리가 대면하는 북한 정권으로부터의 위협은 미국이 당면한 테러위협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 이뤄질지 모를 북한의 공격에 대비하고, 적절히 대응하기 위해 필요한 전방위적 정보 수집은 우리 국민도 어느 정도는 납득할 만한 것이다. 국정원의 주장대로 북한의 사주를 받아 온라인상에서 의도적으로 정치적 논란을 증폭시켜 남남갈등을 유발하고, '종북몰이'를 하려는 이들의 실체가 물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한 나라를 대표하는 정보기관이라면 이들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고, 증거를 확보해 법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국가보안법에는 법적 대응의 충분한 근거가 명시돼 있고, 그것이 국가보안법의 존재 이유가 아니겠는가.

댓글로 사이버 공격, 여론조작에 대응하는 정보기관은 사실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미국을 비난하는 네티즌의 글에 CIA요원이 반박 글을 달면서 반미여론에 대응하고, 이스라엘 정부를 비난하는 팔레스타인 네티즌의 글에 모사드 요원이 댓글로 반박한다면 이것을 사이버 테러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으로 볼 수 있을까. 댓글로 테러를 발본색원한다는 건 어불성설일 뿐이다. 절차의 합리성과 목적의 정당성이 결여된 국정원의 행태는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으로도 지탄을 받아 마땅하다.

댓글 공작은 무엇보다 국정원을 향한 국민의 무른 신뢰 기반을 더욱 무너뜨렸다. 게다가 앞으로도 언제든 국정원의 임무가 법적으로나 상식적으로나 불합리한 방식으로 행해질 수 있다는 것과 정치적 악용 가능성이 상존함을 다시금 일깨워줬다. 전자는 국정원의 자체 역량의 강화로 어느 정도 대응할 수 있겠지만 후자는 박 대통령이 얘기한 것처럼 자체 개혁으로는 결코 해결하기 어렵다.


정치적 악용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말끔히 해소하지 못한다면 국민의 신뢰기반은 결코 단단해질 수 없다. 하지만 야당이 요구하듯 국정원의 국내파트를 분리해 다른 기관을 운영한다고 안보 위협에 대한 합리적 대응과 정치적 중립이라는 두 가지 문제점이 말끔히 해결될 것으로 보긴 어렵다. 조직의 분리 과정에서 생길 안보 공백도 무시할 수 없다.

절충안이 필요한 대목이다. 국회 정보위원회가 가진 감시, 감독 기능을 대폭 강화하는 것이 일차적으로 외과적 수술을 피하며 국정원을 정상화하는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정보위원회의 역할은 국정원의 예산안과 결산만을 심사하는 데 그치고 있다. 돈을 어떻게 쓰는지만 알면 된다는 것인데, 이것만으로는 댓글 사건에서 드러났듯 국회의 시선 밖에서 국정원의 정치적 악용을 방지하기 어렵다.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할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예산뿐 아니라 구체적인 작전까지도 국회의 사전·사후 승인을 받도록 하고, 사법부의 최종 승인까지 거치게 해 합리적 절차와 정치적 중립성을 담보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국정원을 두고 "대통령이 나쁜 일 시키지 않으면 혼자서 나쁜 일 하지 않을 수준에 와 있는 것 같다"고 말했지만 이 또한 순진한 믿음에 불과했다는 게 드러났다. 국민들은 아직 대통령도 못 믿겠고, 국정원도 못 믿겠다. 그게 한국 사회의 신뢰 수준이고 정치권은 이를 인정해야 한다.

잘잘못을 떠나 프리즘이 미국 내의 정치적 역풍을 피해갈 수 있었던 이유도 국회와 대법원의 사전 승인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최소한 국정원에 대한 국회와 사법부의 국정원에 대한 감시 권한과 기능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 이정도도 거부한다면 박 대통령이나 국정원이나 개혁의지는 아예 없다고 봐야 한다. 국정원, 아직 겁난다.
#국정원 개혁 #국정원 댓글 논란 #국회 정보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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