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표지
문학과지성사
'긍정'에 대한 이야기는 비단 대형서점의 인기상품 목록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종교마다 '긍정'에 대한 이야기는 만연한다. '할 수 있다!'는 맹신적인 믿음은 그것이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이든 무엇이든 '믿음의 부재'로 '할 수 없음'을 힐난한다.
사회 곳곳에서 '할 수 없다'거나 '가능하지 않다'는 이야기는 부정적인 것으로 비치는 것이다. '할 수 없다'는 판단이 객관적인 현실이라도, 갑을 관계에서 '을'의 입장이라면 그것은 을이 감당해야 하는 책임으로부터 회피하기 위한 꼼수 정도로 여겨진다. 조직사회에서 '긍정'을 '부정'한다는 것은 조직사회로부터 배척을 당하는 출발점일 수 있다는 점에서, 개인조차도 '긍정의 덫'에 빠져 살아간다.
이 사회에서는 성공만이 유일한 규율이다. 성공을 위해서 가장 강조되는 것이 바로 긍정의 정신이다. 과잉된 긍정은 여러 부작용을 낳는다. 자신의 능력과 성과를 통해서 존재감을 확인하려 자아가 피로해진다. 스스로 설정한 요구에 닿지 못하자 좌절감이 생기고 이는 우울증으로 이어진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p.24)는 것이 <피로사회> 저자 한병철 교수의 설명이다.
긍정성의 과잉 상태에 아무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은 그 어떤 주권도 지니지 못한다.(p.27)이 책에서는 성과사회를 자본주의 시스템의 진화가 낳은 결과로 본다. 결국 성과주체가 자기 자신을 착취하고, 가해자이며 동시에 피해자가 되는 것이다. 성과사회에서의 피로는 더 많은 성과를 방해하는 것이기에 극복 대상이 될 뿐이다.
성과사회에 맞선 사색적인 삶, 동양적 무위이 책에서는 성과사회에 맞서 휴식과 사색적 삶, 동양적 무위를 강조한다. 한병철 교수는 '사색적인 삶은 보는 법에 대한 특별한 교육을 전제한다'면서 니체의 <우상의 황혼>에서 교육자의 도움이 필요한 세 가지 과업을 말한다. 인간은 보는 것을 배워야 하고,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말하고 쓰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사색적 삶의 부활이야말로 성과사회의 과잉 활동적 반응과 즉각적인 반응에 대해 머뭇거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할 수 있다고 본다. 성과사회, 무한 긍정의 사회에서 우리는 분노하는 법도 잊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의 긍정성이 증가하면서 불안이나 슬픔처럼 부정성에 바탕을 둔 감정, 즉 부정적 감정도 약화된다.(p. 51)
"부정할 수 없고,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만 있고 하지 않을 힘은 없다면 우리는 치명적인 활동과잉 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다"(p.53)라는 한병철 교수의 지적은 무한 긍정을 강요하는 오늘 우리의 현실 속에서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인간상을 양산해내는 현실로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한병철 교수는 '피로사회' 혹은 '활동사회'라고도 할 수 있는 성과사회는 서서히 도핑사회로 발전해간다고 한다. 도핑은 성능 없는 성과를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최근에는 과학자들조차도 이런 약물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무책임한 태도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만일 모두가 똑같은 약을 구할 수 있으면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들에 대해 한병철 교수는 스포츠의 예를 들면서 도핑이 허용된다면 스포츠 경기는 약학적 경쟁의 장으로 변질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과도한 성과의 향상은 곧바로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맥락에서 피로는 새로운 차원으로 해석된다. 그는 피로가 너무 많은 활동에 대한 욕망을 억제하며, 긍정주의로 무장한 자아의 성과에 대한 집착을 완화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이런 피로를 부정적 의미의 '자아 피로'와 다른 '근본적인 피로'로 구분한다. 근본적인 피로를 통해 자신의 성공을 위해 채찍질하는 대신 타자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새로운 영감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분열적인 피로와 근본적인 피로한트게는 <피로에 대한 시론>에서 성과 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분열적인 피로, 탈진의 피로)와 분열시키는 피로의 대립자로서의 피로(세계를 신뢰하는 피로, 근본적인 피로)로 구분한다.
탈진의 피로는 긍정적 힘의 피로다. 그것은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 간다. 영감이 주는 피로는 부정적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 (줄임) 피로는 무장을 해제한다. 피로한자의 길고 느린 시선 속에서 단호함은 태평함에 자리를 내준다.(p.72)성과사회는 피로사회다, 피로사회에서 현대인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다. 미래사회 역시도 피로사회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인 피로의 사회로 피해자와 가해자로서가 아닌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인간성을 회복해가는 정신적 이완의 정점을 경험하게 하는 피로사회일 것이다.
이 책은 짧은 에세이 형식으로 구성되었으나 이 짧은 철학 에세이는 독일에서 출판된 지 2주만에 매진이 되면서 독일사회에서 반향을 일으켰으며, 한병철 교수를 독일에서 가장 주목받는 문화비평가의 반열에 서게 하였다. 그 때문만이 아니라, 성과사회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기 스스로 가해자가 되어 자신을 피해자로 만드는 현실에서 한 걸음 물러서 자신을 반추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는 책이라 여겨져 추천하는 것이다.
아주 오래전 해답을 찾았고, 그런 삶을 일부분 경험했다. 그런데도 성과사회 시스템의 유혹에 휘말려 우왕좌왕하며 내 삶을 스스로 착취하면서, 그 문제점을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여전히 성과사회의 올무에 갇혀 있는 중년의 삶을 살아간다. 성과사회라는 올무의 빗장은 누가 채운 것이 아니라, 내가 채운 것이기에 용기를 낸다면 그 빗장을 걷어내고 푸른 하늘로 날아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자유로운 삶일 터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 올무 안에서의 피로사회를 즐기며 가해자로서 피해자로서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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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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