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춧값 얼마나 떨어진지 알어? 에휴"

고추 등 밭작물 값 폭락에 농촌 추석 민심은 '흉흉'

등록 2013.09.21 14:51수정 2013.09.21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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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란히 걸린 귀향 환영 현수막과 국정원 비난 현수막 오랜 기다림 끝에 도착한 고향 선착장 입구에 '국정원을 해체하라'는 시국관련 현수막이 귀향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런데 낙도 선착장에서 본 국정원 관련 현수막이 웬지 어색하다.
나란히 걸린 귀향 환영 현수막과 국정원 비난 현수막오랜 기다림 끝에 도착한 고향 선착장 입구에 '국정원을 해체하라'는 시국관련 현수막이 귀향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런데 낙도 선착장에서 본 국정원 관련 현수막이 웬지 어색하다.이혁제

섬을 고향으로 둔 사람들은 명절 때면 이중고를 겪는다. 육지 사람들은 고속도로에서 평소보다 몇 시간 더 지체한다고 야단들이지만 섬 태생들은 고속도로의 막힘을 뚫고 와도 또다시 '기다림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바다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자가용을 포기하고 몸만 가져간다면 기다림 없이 배를 탈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귀성객들은 자가용을 포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가용은 성공한 섬 귀성객들의 자부심이고 부모님에게 드릴 선물 박스기 때문이다. 또한 귀경길에 부모님의 사랑을 한가득 싣고 나올 때도 반드시 필요하다.

선착장까지 3km 정도 늘어선 자가용 행렬 때문에 족히 4시간은 기다려야 배를 탈 수 있을 것 같아 우리 가족은 자가용을 주차장에 놓고 몸만 들어가기로 했다. 20분 만에 도착한 고향 선착장에서 귀성객들을 맞이하고 있는 것은 현수막 두 개였다. 하나는 귀향 환영 현수막이고 다른 하나는 국정원 대선개입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같은 현수막을 도시에서 볼 때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섬에서 시국 관련 현수막을 보니 솔직히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앞섰다.

때 이른 추석인지 고향 들녘은 아직 벼이삭이 고개를 덜 숙이고 있었다. 대신 밭작물 수확은 거의 끝나고 있었다. 농민들은 지난 여름 뙤약볕에서 고생한 고추·콩·녹두 등을 마무리 하고 내년 여름 수확을 위해 마늘과 양파 심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농촌에서 명절은 설뿐이다. 추석은 한 참 농사철이기 때문에 고생하시는 부모님 일손 도우러 가는 게 오히려 맞을 것 같다.

엄마, 이것 다 팔면 얼마 벌어?

갈아 엎기 전에 쓰러뜨린 고추나무 고추나무엔 아직 고추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지만 그냥 갈아엎기로 하였다. 한 근에 6,500원인 고추 값은 인건비도 되지 않는다.
갈아 엎기 전에 쓰러뜨린 고추나무고추나무엔 아직 고추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지만 그냥 갈아엎기로 하였다. 한 근에 6,500원인 고추 값은 인건비도 되지 않는다.이혁제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버지가 입으셨던 와이셔츠와 바지로 갈아입고 밭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600평 정도 되는 밭 한 귀퉁이에 고추를 심고 나머지는 녹두를 심었다. 고추나무에는 아직도 고추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매일 어머니 혼자서 허리를 구부리고 고추와 녹두를 땄던 밭을 오늘은 4형제가 접수했다. 여기에 며느리들까지 함께 했으니 그야말로 녹두 반, 사람 반이다.

아무리 추석이 빠르다고 해도 가을인데 날씨가 꼭 한 여름 더위였다. 얼굴 탈까봐 선크림 바르고 목 밑까지 내려오는 모자를 둘러쓰고 나왔지만, 한 시간을 못 버틸 지경이었다. 녹두나 고추 따는 일은 일일이 손으로 해야 한다. 특히 녹두는 한 꺼 번에 다 익지 않기 때문에 까맣게 익은 녹두와 아직 새파란 녹두가 한 가지에 열려 있어 따기가 영 쉽지 않다.

어머니는 매일 조금씩 익은 녹두만 골라서 땄다고 한다. 그리고 곧 양파를 심어야 하기 때문에 몇 번만 더 따고 녹두나무를 거둬들여야 한다고 했다. 나는 어머니에게 올 여름 녹두 팔아서 얼마나 벌었냐고 물어봤다. 어머니는 지금까지 녹두 팔아 150만 원의 수익을 얻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고추밭을 빼면 500평의 밭에서 지난 6월부터 석 달간 뙤약볕에서 고생한 노동의 대가로 150만 원을 번 것이다. 물론 농촌에서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럼 오늘 우리가 따면 얼마나 더 벌 수 있어요?"
"응, 집에 남은 것 하고 합치면 한 10만 원을 받을 수 있어."

순간 나는 나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성인 8명이 족히 두 시간은 따야 되는 녹두 값이 10만 원도 채 안되다니…. 함께 녹두를 따고 있는 둘째 형의 하루 일당이 20만 원이 넘는다. 둘째 형은 특수용접공이다. 같은 노동을 하는데 이렇게 차이가 난다.


"그럼 올해 고추 값은 어때요?"
"고추금은 더 형편 없제. 작년에는 한 근에 1만5000원이 넘었는데 올해는 6500원이란다. 올해 고추농사를 많이 지은 영식이네는 죽을라고 한단다."

엄마, 그냥 갈아엎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요

농민에게 농작물은 자식과도 같다고 하지만 자식 때문에 부모가 뼈가 빠진다면 그런 자식은 없는 것이 나을 것이다. 나는 어머니에게 차라리 녹두랑 고추랑 그만 따고 우리 있을 때 그냥 갈아엎자고 했다. 도시사람들은 계산이 빠르다. 내가 봤을 때 추석 휴일 내내 녹두·고추를 다 따도 30만 원의 수익을 내기도 힘들 것 같았다. 돈도 돈이지만 우리가 떠나고 나면 어머니 혼자 이 넓은 밭을 다 매야 한다.

"엄마, 둘째 형 하루 일당도 안 되는 돈 벌려고 온 식구가 지금 고생해야 되겠어요? 차라리 빨리 처분하고 집에 가서 오순도순 형제들 끼리 얘기하면서 맛있는 것 해 먹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에요."

엄마는 마지못해 우리의 의견에 동의했다. 아직 열매가 열린 곡식을 갈아엎는다는 것을 어머니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도시에서 고생했을 자식들에게 추석 때까지 고생시키는 게 마음에 걸린 것이 분명했다. 고추나무를 지지하고 있는 지지대를 뽑고, 벌초할 때 쓰는 예초기로 녹두나무를 베어내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들지 않았다.  

광에 보관 된 올 해 수확한 고추, 마늘, 깨 농민들은 매 년 자식을 키우듯 농작물을 키우지만 고생한 만큼의 정당한 대가는 요원한 실정이다.
광에 보관 된 올 해 수확한 고추, 마늘, 깨농민들은 매 년 자식을 키우듯 농작물을 키우지만 고생한 만큼의 정당한 대가는 요원한 실정이다.이혁제

마당에서 추석 파티가 벌여졌다. 매제가 왕새우 5kg를 사왔다. 10만 원 어치다. 10만 원은 어머니가 하루 종일 녹두를 따도 벌지 못할 돈이지만 둘째형이 한 나절만 일해도 벌 수 있는 돈이었다. 옆 마을 염전에서 공수한 천일염위에서 왕새우가 노릇노릇 구워졌다. 지나가는 동네 어른신도 함께했다.

"박근혜가 농민들 다 죽이고 있어야. 한 근에 1만5000원 하던 고춧값이 얼만지 아냐? 6500원이여. 양파는 또 어쩌고. 올해 농협은 저장한 양파 값이 폭락해서 무지한 손해를 볼 것이구먼."

소주잔의 왕래가 잦을수록 어르신의 한숨은 깊어만 갔다.

"녹두고 콩이고 지금 봐라. 작년보다 더 떨어졌다. 이게 다 박근혜 때문이여. 곡식값이 조금만 오르려고 하면 다 수입해불고. 폭락하믄 그냥 보고만 있고…."

도시에서는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때문에 비판받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이 농촌에서는 고추 값 때문에 욕을 먹고 있었다. 국정원 사건이야 워낙 시끄러워서 대통령도 민심을 잘 알겠지만 고춧값으로 인한 농심은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농민들은 순수하다. 고추 수입을 지시한 것도, 양파 수입을 지시한 것도 대통령이 한 줄 안다. 반대로 태풍 피해 보상도, 농사 자금 지원도 대통령이 해주는 것으로 안다. 욕을 먹는다고 해서 억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꽉 막힌 귀경길만큼이나 답답한 농촌 현실

배를 타려는 귀경 차량들이 꼬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늘어서 있다. 섬에서 육지로 빠져 나가려는 늘어선 차량들 처럼 암담한 농촌현실 또한 답답하기만 하다.
배를 타려는 귀경 차량들이 꼬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늘어서 있다.섬에서 육지로 빠져 나가려는 늘어선 차량들 처럼 암담한 농촌현실 또한 답답하기만 하다. 이혁제

우리나라 농촌문제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역대 어떤 정권에서도 농민들의 아픔을 치유해 줄 수 있는 성과를 내지 못했다. 박근혜 정부 또한 농촌문제에 대한 뚜렷한 해법이 없을 것이다.

쌀농사는 농민들에게 마지 못해 하는 일쯤이 됐다. 농민의 고령화와 기계화로 인한 인건비등 부대비용을 제외하면 수익이 거의 남지 않기 때문이다. 밭작물은 앞을 알 수 없는 도박판이다. 가격 폭락이 빈번하고, 어쩌다 가격이 좋으면 정부는 금세 수입을 해버린다. 물론 정부의 입장에선 소비자 가격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명분 때문에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집권한 지 벌써 7개월이 됐다. 대북문제에 대한 노력으로 개성공단 정상화가 이야기되고 있다. 또한 활발한 외교로 국익을 챙겼다는 평도 있다. 그러나 너무 큰 그림만 그리다 보면 세심함을 놓칠 수 있다. 고춧값 문제가 그에 해당한다. 대통령이 농민 다 죽이고 있다고 믿는 농민들이 더 늘어나기 전에.
#고추값 폭락 #추석 농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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