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아 엎기 전에 쓰러뜨린 고추나무고추나무엔 아직 고추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지만 그냥 갈아엎기로 하였다. 한 근에 6,500원인 고추 값은 인건비도 되지 않는다.
이혁제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버지가 입으셨던 와이셔츠와 바지로 갈아입고 밭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600평 정도 되는 밭 한 귀퉁이에 고추를 심고 나머지는 녹두를 심었다. 고추나무에는 아직도 고추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매일 어머니 혼자서 허리를 구부리고 고추와 녹두를 땄던 밭을 오늘은 4형제가 접수했다. 여기에 며느리들까지 함께 했으니 그야말로 녹두 반, 사람 반이다.
아무리 추석이 빠르다고 해도 가을인데 날씨가 꼭 한 여름 더위였다. 얼굴 탈까봐 선크림 바르고 목 밑까지 내려오는 모자를 둘러쓰고 나왔지만, 한 시간을 못 버틸 지경이었다. 녹두나 고추 따는 일은 일일이 손으로 해야 한다. 특히 녹두는 한 꺼 번에 다 익지 않기 때문에 까맣게 익은 녹두와 아직 새파란 녹두가 한 가지에 열려 있어 따기가 영 쉽지 않다.
어머니는 매일 조금씩 익은 녹두만 골라서 땄다고 한다. 그리고 곧 양파를 심어야 하기 때문에 몇 번만 더 따고 녹두나무를 거둬들여야 한다고 했다. 나는 어머니에게 올 여름 녹두 팔아서 얼마나 벌었냐고 물어봤다. 어머니는 지금까지 녹두 팔아 150만 원의 수익을 얻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고추밭을 빼면 500평의 밭에서 지난 6월부터 석 달간 뙤약볕에서 고생한 노동의 대가로 150만 원을 번 것이다. 물론 농촌에서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럼 오늘 우리가 따면 얼마나 더 벌 수 있어요?""응, 집에 남은 것 하고 합치면 한 10만 원을 받을 수 있어."순간 나는 나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성인 8명이 족히 두 시간은 따야 되는 녹두 값이 10만 원도 채 안되다니…. 함께 녹두를 따고 있는 둘째 형의 하루 일당이 20만 원이 넘는다. 둘째 형은 특수용접공이다. 같은 노동을 하는데 이렇게 차이가 난다.
"그럼 올해 고추 값은 어때요?" "고추금은 더 형편 없제. 작년에는 한 근에 1만5000원이 넘었는데 올해는 6500원이란다. 올해 고추농사를 많이 지은 영식이네는 죽을라고 한단다." 엄마, 그냥 갈아엎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요 농민에게 농작물은 자식과도 같다고 하지만 자식 때문에 부모가 뼈가 빠진다면 그런 자식은 없는 것이 나을 것이다. 나는 어머니에게 차라리 녹두랑 고추랑 그만 따고 우리 있을 때 그냥 갈아엎자고 했다. 도시사람들은 계산이 빠르다. 내가 봤을 때 추석 휴일 내내 녹두·고추를 다 따도 30만 원의 수익을 내기도 힘들 것 같았다. 돈도 돈이지만 우리가 떠나고 나면 어머니 혼자 이 넓은 밭을 다 매야 한다.
"엄마, 둘째 형 하루 일당도 안 되는 돈 벌려고 온 식구가 지금 고생해야 되겠어요? 차라리 빨리 처분하고 집에 가서 오순도순 형제들 끼리 얘기하면서 맛있는 것 해 먹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에요."엄마는 마지못해 우리의 의견에 동의했다. 아직 열매가 열린 곡식을 갈아엎는다는 것을 어머니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도시에서 고생했을 자식들에게 추석 때까지 고생시키는 게 마음에 걸린 것이 분명했다. 고추나무를 지지하고 있는 지지대를 뽑고, 벌초할 때 쓰는 예초기로 녹두나무를 베어내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