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로 공산주의자올시다"

[영원한 자유를 꿈꾼 불온시인 김수영 57] <눈>

등록 2013.10.07 12:14수정 2013.10.07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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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시인
이제 저항시는
방해로소이다
이제 영원히
저항시는
방해로소이다
저 펄 펄
내리는
눈송이를 보시오
저 산허리를
돌아서
너무나도 좋아서
하늘을
묶는
허리띠모양으로
맴을 도는
눈송이를 보시오

요 시인
용감한 시인
―소용없소이다
산 너머 민중이라고
산 너머 민중이라고
하여둡시다
민중은 영원히 앞서 있소이다
웃음이 나오더라도
눈 내리는 날에는
손을 묶고 가만히
앉아 계시오
서울서
의정부로
뚫린
국도에
눈 내리는 날에는
'빽'차도
지프차도
파발이 다 된
시골 버스도
맥을 못 추고
맴을 도는 판이니
답답하더라도
답답하더라도
요 시인
가만히 계시오
민중은 영원히 앞서 있소이다
요 시인
용감한 착오야
그대의 저항은 무용(無用)
저항시는 더욱 무용
막대한 방해로소이다
까딱 마시오 손 하나 몸 하나
까딱 마시오
눈 오는 것만 지키고 계시오…….
(1961. 1. 3)


4월 혁명 이후 수영의 물리적인 시선은 온통 세상을 향해 있었다. 4·19 당시에 줄기차게 데모대에 합류한 그였다. 혁명의 과업을 이루는 일은 가장 큰 관심사 중의 하나였다. 4월 혁명 직후, 날 선 단어들로 쓰인 수 편의 혁명시가 그 구체적인 증거들이다.

하지만 혁명은 지리멸렬하기만 했다. 수영은 안타까웠다.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혁명에 대해 가졌던 뜨거운 기대감도 자연스럽게 스러져가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겪어보는 혁명의 흥분 속에서 그는 완전한 언론 자유의 세상이 올 수 있으리라 여겼다. 북한에 대해, 그리고 여하한 이념과 사상에 대해 완전히 자유롭게 말하고 글로 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언론 자유를 향한 수영의 집념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일화가 있다. 1961년의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다. 수영은 억 병으로 술을 마셨다. 술집을 나온 수영은 눈 위에 쓰러졌다. 그대로 있다가는 얼어 죽을 판이었다. 다행히 지나가던 학생이 수영을 업어 파출소에 데려다 주었다. 파출소에 업혀 간 수영은 술기운 속에서도 천연스러웠다. 수영은 순경을 향해 절을 하고 이렇게 외쳤다.

"내가 바로 공산주의자올시다."(<김수영 전집 2 산문>(240쪽)

수영은 공산주의 사상이나 이념에 대해 깊은 콤플렉스가 있었다. 한국전쟁 시기에 인민 의용군으로 끌려간 이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갈증이 그 누구보다 강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그는 유난히도 자의식이 강한 시인이 아니었던가.


나는 이튿날 사지가 떨어져 나갈 듯이 아픈 가운데에도 이 말을 듣고(파출소에 끌려가 술기운에 난동을 벌인 것을 다음 날 그의 아내가 말해 줌-기자) 겁이 났고, 그렇게 겁을 내는 자신이 어찌나 화가 났던지 화풀이를 애꿎은 여편네 한데 다 하고 말았었다. 겁을 낸 자신이, 술을 마시고 '언론자유'를 실천한 내자신이 한량없이 미웠다.(<김수영 전집 2 산문>(240쪽)

완전한 언론 자유를 향한 수영의 목소리는 곳곳에 남아 있다. 그는 어느 날 일기에 일본 문인들이 소련과 중국 같은 곳으로 초빙을 받아 가서 유익한 점을 배우기도 하고, 비판도 자유로이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적어 놓는다. 수영은 1960년 하반기에 쓰인 <허튼소리>나 <잠꼬대> 같은 작품을, 언론 자유의 희생과 언론의 부자유에 대한 고발 작품으로 자평하고 있다.


하지만 세상은 수영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언론 자유는 요원하기만 했다. <허튼소리>와 <잠꼬대>는 신문사에서 연달아 퇴짜를 맞았다. 신문사의 검열을 통과하지 못하는 작품을 쓴 그가 하소연할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아는 사람이 즐비한 신문사에서 자신의 시를 퇴짜 맞는 기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렇다고 그가 총체적인 좌절과 절망 속에만 있지는 않았다. 그는 혁명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의 전망이나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4월 혁명 후 반년만에 나온 <그 방을 생각하며>에는 수영이 겪은 그런 일련의 심리적 체험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그런데 수영의 심리적 변화는 이 시에서 또 한 번의 새로운 변곡점을 가진다. 그는 이제 시마저도 버리려 한다. '저항시'는 '방해'이고 '무용(無用)'이라고 거듭 외친다. "요 시인 / 용감한 시인"(2연 1, 2행)이라고 부르는 그 '시인'은 바로 그 자신일 터.

'저항시'를 쓰는 시인이니 '용감'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저항시'는 '방해'이고 '무용'이다. 그러니 '용감한'은 일종의 반어적 형용사다. 갑작스레 웬 반어인가. 그는 용감하지 않다. 용감한 체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지금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시'로 '저항'을 하겠다면 더욱 뜨겁게 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답답하더라도 / 답답하더라도"(2연 23, 24행) 조용히 있어야 한다. '저항시'를 쓴다며 어설프게 잘난 체해서는 안 된다.

무엇 때문인가. '민중'에 대한 확신, '민중'이 역사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 때문이다. 그는 "산 너머 민중"(2연 4행)을 거듭 부르짖는다. "민중은 영원히 앞서 있"(7행)다고도 말한다. 가당찮은 '저항시' 따위를 쓰는 '시인'이 아니라 "영원히 앞서 있"는 민중이야말로 세상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라는 것.

이는 자의식에 천착하던 수영에게는 커다란 변화다. 지리멸렬한 혁명에 좌절하던 수영에게 '민중'이야말로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는 존재가 아니었을까. 그런 점에서 수영은 '저항시' 무용론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저항시'를 쓰지 않겠다며 절망의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지금 "영원히 앞서 있"는 민중을 위한 진짜 '저항시'를 쓰기 위해 굳은 다짐을 하고 있는 중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눈>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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