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하지 않은 운동가, 나강수가 그립다

십시일반 성금을 모아 추념 조형물을 세우며

등록 2013.10.14 09:44수정 2013.10.14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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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곳에서의 경험이 일천한 나는 가끔 우리나라 땅이 결코 좁지 않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특히 교통이 원활하지 못한 지역에서 그렇다. 어제(10월 12일)도 그런 날 중 하루에 속할 것이다. 새벽 6시에 집을 나서서 오후 2시에 목적지에 도착했으니 자그마치 8시간을 기차에서 또는 거리에서 보낸 셈이다. 그것도 목회자로서 주일을 준비해야 할 토요일에 말이다.


지금은 행정구역상으로 광주광역시에 포함되어 있지만 광주와 통합되기 전 이곳은 전남 광산군이었다. 전형적인 농촌 마을, 배산임수(背山臨水) 지역, 볕 따뜻이 드는 그곳에 경민 나강수 선배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죽음을 따질 연치가 되기 전부터 죽으면 여기에 묻어달라고 유언 아닌 유언을 했던 바로 그 장소에 나 선배의 묘소는 소담스럽게 자리하고 있었다.

a 양지바른 곳 나강수 선배 묘소 앞에서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치동 양지바른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나강수 선배 묘소. 추념 조형물 제막식을 위해 동료 후배들이 많이 모였다.

양지바른 곳 나강수 선배 묘소 앞에서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치동 양지바른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나강수 선배 묘소. 추념 조형물 제막식을 위해 동료 후배들이 많이 모였다. ⓒ 이명재


대중교통을 이용한 내가 그곳까지 가는데 하루의 3분의 1을 소비했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됐을 것이다. 아니,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지는 않을 일이었다. 왜냐하면 대부분이 그룹을 지어 자동차를 이용해 그곳까지 왔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일찍 만나 여유롭게 차를 달렸지만 만추의 계절에 더해 주말인지라 도로 체증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오후 1시에 시작하기로 한 행사가 1시간 반이나 지난 뒤 겨우 진행될 수 있었다.

이날은 경민(耕民) 나강수 선배를 그리워하는 후배들이 십시일반 성금을 모아 그를 추념하는 조형물을 봉헌하기로 한 날이다. 나 선배는 6·3 한일회담 반대 데모부터 시작해 남민전 사건에 연루된 바 있으며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서울민중연합,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등 재야 활동을 해온 시종여일(始終如一)한 운동가였다. 이번 추념 조형물은 그 중 서울민중연합·민족학교 후배들이 주관이 되어 준비해왔다.

a 추념 조형물 전면 서민련 후배들이 십시일반 성금을 모아 만든 나강수 선생 추념 조형물 전면. 이 작품은 작가 김운성이 수고비를 받지 않고 제작해 준 것이다.

추념 조형물 전면 서민련 후배들이 십시일반 성금을 모아 만든 나강수 선생 추념 조형물 전면. 이 작품은 작가 김운성이 수고비를 받지 않고 제작해 준 것이다. ⓒ 이명재

소담스런 봉분과 조화롭게 추념 조형물도 아담했다. 아담하면서도 친근했고, 친근하면서도 마음에 두고 싶었으며, 마음에 두고 싶으면서도 그 뜻을 음미하며 행동하게 만드는, 그런 조형물이었다. 폭 80cm에 높이 120cm 두께 30cm. 그 속에 담고 싶은 내용은 다 담은 듯했다. 이 조형물 제작은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설치한 소녀상의 제작자 김운성 작가가 맡아 주었다. 민중과 함께 호흡하는 사람들이 다 그렇듯 김 작가도 제작비를 거의 받지 않았다고 한다.

추념 조형물 전면엔 이런 글이 씌어져 있다. 제목이라고 해도 괜찮을 '나강수 선생을 생각하며…'라는 큰 글씨체. 그 아래 이번 조형물 제작에 성금을 낸 후배 동지들의 이름이 꽃잎 모양으로 새겨져 있고, 그 밑에 나 선배의 삶을 압축적으로 요약해 놓은 듯한 '야만의 시대에 맞서 / 민중 해방을 위해 싸웠던 / 나강수 선생의 / 순수 겸허 헌신의 정신을 / 기리고 계승하는 동지들이 여기 표석을 세운다'라는 문구가 있다. 그리고 뒷면엔 나강수 선배가 살아온 싸움의 역정이 연도별도 정리되어 있었다.


인간 관계가 점점 좁아지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시대 상황인지 모른다. 하지만 난 적어도 윤리와 도덕성을 생명으로 하는 '운동권'의 인간 관계는 이런 시대 조류를 답습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거를 뒤돌아보면 운동권도 세상과 오십보백보가 아니었나 싶다. 이론이 탁월하면 인간미가 부족하고, 실천이 뛰어나면 관계성이 떨어지는 그런 운동 선배들을 무수히 보아왔다.

a 수고한 후배들 이번 추념 조형물 설치에 수고한 후배들이 나강수 선배 묘소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수고한 후배들 이번 추념 조형물 설치에 수고한 후배들이 나강수 선배 묘소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 이명재


나강수 선배는 탁월한 이론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앞장서서 치열하게 투쟁한 실천가도 아니다. 그런데 많은 후배들이 그를 따르는 이유는 뭔가? 인정과 사랑이 풍성한 선배여서가 아닐까. 후배들의 부족함을 질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보완해 주려고 한 선배, 정(正)과 부(否)에 명확한 선을 긋고 후배들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정은 더 다듬게 하고 부는 서서히 버리게 만드는 그런 자세로 늘 후배들을 대했다. 그를 만나 운동의 지침을 배우는 것은 아니되 무언가 든든함을 느끼게 되고, 그의 어눌한 듯한 말 속에서 유약함이 아니라 투쟁의 의지를 더욱 단련되게 만드는 그런 마력을 나 선배는 가지고 있었다.


추념 조형물 봉헌식에 친구 대표로 참석한 허성만 전 농림부 장관이 친구 나강수를 소개하면서 한 일화(逸話)를 들려주었다. '6·3사태'라고 불리는 굴욕적인 한일 회담에 대한 반대 데모는 서울이 아닌 지방의 전남대에서 첫 봉화가 올려졌다고 한다. 그때 전남대 주동자로 세 명을 들 수 있는데, 법대에 박석무, 문리대에 양성우 그리고 농대에 나강수가 그들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나강수 선배를 실천력이 좀 덜한 운동 선배로 보고 있는 후배들의 시각도 약간은 교정되어야 할 지 모르겠다. 갓 스무 살의 나이에 군사 쿠데타 직후 체제 반항적인 운동을 주도한 것은 그의 인생 행로에 쐐기를 박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a 친구 대표 허성만 전 농림부 장관 나강수 선배의 친구 대표로 제막식에 참석한 허성만 전 농림부 장관이 전남대 학창시절을 회고하고 있다.

친구 대표 허성만 전 농림부 장관 나강수 선배의 친구 대표로 제막식에 참석한 허성만 전 농림부 장관이 전남대 학창시절을 회고하고 있다. ⓒ 이명재


나 선배는 참여하되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단체에 관계하되 결코 주도권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실익을 염두에 두기보다도 늘 원칙에 충실한 운동가였다. 하나의 이야기가 좋은 예증이 되지 않을까 싶다.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두환 독재에 맞서 6·10항쟁으로 싸운 국민이 대통령 직선제를 관철해 냈다. 국민의 하나 된 힘이 독재 권력의 아성을 허문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암초가 우리 앞을 막고 있었다. 군사정권의 아류인 민정당 노태우 후보에 맞설 야당 후보를 정하는 일이 그것이다. 김대중 김영삼 두 사람 중 한 사람으로 후보를 단일화하면 노태우를 이길 수 있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 다시 군사정권을 연장시켜 주는 일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운동권도 양분되었다. 비판적 지지파(김대중 후보를 비판적으로 지지한다는 것으로 실제 내용은 김대중 지지이다)와 후보단일화파(김대중 김영삼 두 후보가 단일화되어야 노태우 후보에게 승산이 있다는 것인데, 실제 후보단일화를 이끌어 가는 지도부는 은연중 김영삼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내뻗은 철로처럼 팽팽히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이때 운동권도 지역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호남 쪽 운동가들은 비판적 지지파에, 영남 쪽 운동가들은 후보단일화에 치우쳐 있었다.

경민 나강수 선배는 호남 출신이다. 전남 광산(지금은 광주광역시와 통합이 되어 광주 광산구가 되었음) 출신으로 순수 전라도 사람이다. 서울에서 생활하면서도 나 선배는 전라도 사투리를 당당하게 쓰면서 사는, 많지 않은 호남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당시 그를 알고 있는 많은 운동가들이 당시 나 선배를 이야기하며 '나강수=전라도 출신=비판적 지지'라는 등식으로 보고 있었다. 서울 민통련이란 단체에서 그와 함께 활동한 나도 그렇게 보고 있었다. 이런 난리법석 속에 많은 운동단체들이 나뉘어졌고, 서울 민통련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김병걸, 정동익, 유영래 등이 비판적 지지를 선언했고, 이재오, 조춘구, 김광수 등이 후보단일화 편에 섰다.

모두들 나강수를 주시했다. 그때 그는 운동도 인간을 위해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이라며 사람들이 예측한 것과는 달리 후보단일화를 지지하고 나섰다. 그의 입장이 이렇게 정리되자 서울 민통련 내 후보단일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서울 민통련을 탈퇴하고 새로 서울민중연합 민족학교를 창립할 수 있었다(1988년 2월). 나강수 선배가 아무리 자리를 탐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도 만약 1987년 대선 국면에서 그가 비판적 지지 쪽에 섰다면 국회의원 한 자리는 어렵지 않게 차지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는 명분과 의리 그리고 지조를 생명과 같이 여기면서 70년 성상을 살아온 사람이다.

a 추념 조형물 제막식 나강수 선배 추념 조형물 제막식 광경. 서민련 임원진과 유족들 그리고 친구들이 조형물을 덮고 있던 하얀 천을 제거하고 있다.

추념 조형물 제막식 나강수 선배 추념 조형물 제막식 광경. 서민련 임원진과 유족들 그리고 친구들이 조형물을 덮고 있던 하얀 천을 제거하고 있다. ⓒ 이명재


광주 광산의 양지바른 산기슭에 후배들이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모아 세운 추념 조형물이 고인에게 그리고 유족에게 작은 위안이 되면 좋겠다. 보수 정권 2기로 접어들면서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어렵게 쌓아올린 이 땅의 민주주의가 퇴락해 가는 것 같은 위기감에 휩싸인다. 유신독재 질곡의 잔영이 눈에 아른거린다. 나강수 선배가 지금 살아있다면 후배들을 다독이며 일전(一戰)을 불사할 텐데, 지금 그는 이 땅의 사람이 아니다. 다시 한 번 신발 끈을 동여매고 민주주의 수호의 현장으로 뛰어 들어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경민(耕民)'은 나강수 선배의 아호(雅號)이다. 누가 지어주었는지 참으로 잘 지었다는 생각을 해 본다. 백성들을 경작한다, 백성들을 힘써 기른다는 뜻이다. 참된 백성은 스스로 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것이다.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은 누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각성된 힘으로 쟁취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평생을 민중과 더불어 살면서 민중들의 삶 향상에 헌신한 나강수 선배에게 '경민'이라는 호는 안성맞춤이다. 드러나지 않으면서 진리 정의와 함께 하는 것, 나 선배를 추념하는 조형물 뒷면엔 그것을 웅변이라도 하듯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그늘에 가려 보일듯 말듯 아래와 같은 그의 걸어온 길이 새겨져 있었다. 운동가로서 화려한 이력은 아니지만 그는 꼭 있어야 할 곳에 있었고, 그를 필요로 하는 운동의 자리를 피하지 않고 함께 하는 삶을 살았다. 참으로 변함없는 삶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고가 흐려지고 행동이 굼뜨게 된다는데 나 선배는 세상을 뜰 때까지 한결같은 삶을 살았다. 귀한 삶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이력을 말미에 첨부하면서, 추념 조형물을 받친 후배의 한 사람으로 다시 한 번 천국 안식을 빈다.

'나강수 선생이 살아오신 생애 자취'

1943년 광주시 송치동 546 출생
1964년 한일회담 반대 전남대 투쟁위원장
1969년 삼선개헌 반대 전남대 상임위원장
1975-1979년 남민전 활동과 투옥
1988년 서울민통련 부의장
1991년 서울민중연합 민족학교 의장
1992년 민중후보로 서울 은평갑 국회의원 출마
2012년 2월 자택에서 별세(향년 69세)
#고 나강수 의장 #서울민중연합 민족학교 #추념 조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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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향기 그윽한 김천 외곽 봉산면에서 농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닌 아웃과 아픔 기쁨을 함께 하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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