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대표 허성만 전 농림부 장관나강수 선배의 친구 대표로 제막식에 참석한 허성만 전 농림부 장관이 전남대 학창시절을 회고하고 있다.
이명재
나 선배는 참여하되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단체에 관계하되 결코 주도권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실익을 염두에 두기보다도 늘 원칙에 충실한 운동가였다. 하나의 이야기가 좋은 예증이 되지 않을까 싶다.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두환 독재에 맞서 6·10항쟁으로 싸운 국민이 대통령 직선제를 관철해 냈다. 국민의 하나 된 힘이 독재 권력의 아성을 허문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암초가 우리 앞을 막고 있었다. 군사정권의 아류인 민정당 노태우 후보에 맞설 야당 후보를 정하는 일이 그것이다. 김대중 김영삼 두 사람 중 한 사람으로 후보를 단일화하면 노태우를 이길 수 있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 다시 군사정권을 연장시켜 주는 일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운동권도 양분되었다. 비판적 지지파(김대중 후보를 비판적으로 지지한다는 것으로 실제 내용은 김대중 지지이다)와 후보단일화파(김대중 김영삼 두 후보가 단일화되어야 노태우 후보에게 승산이 있다는 것인데, 실제 후보단일화를 이끌어 가는 지도부는 은연중 김영삼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내뻗은 철로처럼 팽팽히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이때 운동권도 지역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호남 쪽 운동가들은 비판적 지지파에, 영남 쪽 운동가들은 후보단일화에 치우쳐 있었다.
경민 나강수 선배는 호남 출신이다. 전남 광산(지금은 광주광역시와 통합이 되어 광주 광산구가 되었음) 출신으로 순수 전라도 사람이다. 서울에서 생활하면서도 나 선배는 전라도 사투리를 당당하게 쓰면서 사는, 많지 않은 호남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당시 그를 알고 있는 많은 운동가들이 당시 나 선배를 이야기하며 '나강수=전라도 출신=비판적 지지'라는 등식으로 보고 있었다. 서울 민통련이란 단체에서 그와 함께 활동한 나도 그렇게 보고 있었다. 이런 난리법석 속에 많은 운동단체들이 나뉘어졌고, 서울 민통련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김병걸, 정동익, 유영래 등이 비판적 지지를 선언했고, 이재오, 조춘구, 김광수 등이 후보단일화 편에 섰다.
모두들 나강수를 주시했다. 그때 그는 운동도 인간을 위해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이라며 사람들이 예측한 것과는 달리 후보단일화를 지지하고 나섰다. 그의 입장이 이렇게 정리되자 서울 민통련 내 후보단일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서울 민통련을 탈퇴하고 새로 서울민중연합 민족학교를 창립할 수 있었다(1988년 2월). 나강수 선배가 아무리 자리를 탐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도 만약 1987년 대선 국면에서 그가 비판적 지지 쪽에 섰다면 국회의원 한 자리는 어렵지 않게 차지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는 명분과 의리 그리고 지조를 생명과 같이 여기면서 70년 성상을 살아온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