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 백화산 교장바위 안내판, 시급히 바꿔야 한다

등록 2013.10.24 10:07수정 2013.10.24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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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의 <태안신문> 10월 2일 치 '독자 기고'란에 실린 송길성(소원면 모항리) 선생의 글 '백화산 일본인 교장바위'를 읽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우선 송길성 선생의 견해에 공감하면서 감사와 함께 경의를 표한다.


태안의 얼굴이며 상징인 백화산의 대표적인 명물은 국보 제307호인 마애삼존불과 갑오동학농민혁명군추모탑이다. 불교미술품인 마애삼존불은 태안이 유서 깊은 고장임을 알게 한다. 또한 갑오동학농민혁명군추모탑은 태안이 '동학의 고장'이었음과 변혁의 역사를 추구한 태안인의 기개, 즉 '태안정신'의 표상임을 알게 한다.    

a 태안 백화산 교장바위 태안초등학교에서 바라본 백화산 풍경. 우람한 '교장바위' 바로 아래 '갑오동학농민혁명군추모탑'이 보인다.

태안 백화산 교장바위 태안초등학교에서 바라본 백화산 풍경. 우람한 '교장바위' 바로 아래 '갑오동학농민혁명군추모탑'이 보인다. ⓒ 지요하


태안의 진산인 백화산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바위는 '교장바위'다. 태안군은 1998년 이후부터 교장바위 옆에 '교장바위의 유래'를 소개하는 안내판을 설치해놓고 있다. 그 안내판을 볼 때마다 나는 깊은 자괴감을 갖는다.

1920년대 말 태안보통학교 일본인 교장선생님(니카오 이따로)의 미담으로부터 교장바위라는 이름이 생기게 되었다는 설(說)은 온당치 않다. 그 미담은 송길성 선생의 지적대로 하나의 '설'일 뿐이다. 그 설을 애지중지하여 태안군이 안내판까지 만들어 설치해놓은 것은 우선 사려 깊지 못한 일이다.

애초 그 '설'을 자세히 정리해놓은 사람은 나다. 나는 일찍이 향토사학자이며 고장의 원로이신 고(故) 박국환(朴國煥) 선생으로부터 1920년대 말 태안보통학교 니카오 이따로 교장 선생님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태안에서 버스 정류소를 운영하는 '다까하시'(高橋)라는 성품 고약한 일본인에게 반감을 품고 새벽에 정류소에 돌을 던져 파괴한 죄로 주재소 유치장에 갇혔다가 교장선생님의 노력으로 풀려난 학동들 중에는 박국환 선생의 친형도 있었다고 했다. 학부모들이 학교 가까이에 있는 백화산의 가장 큰 바위에 교장선생님의 이름(中尾猪太郞)을 새긴 데서 '교장바위'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얘기였다.


나는 그 얘기를 귀담아 듣고 잘 정리해 두었다가 1997년에 출간한 <태안읍지>의 '전설 편'에 올렸다. 당시에는 내가 큰일을 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그런데 그 후 태안군에서는 필자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태안읍지>에 실린 내 글에서 주요 대목을 뽑아다가 안내판을 만들어 교장바위 옆에 설치했다. 그 안내판을 처음 볼 때부터 나는 이상한 자괴감을 갖기 시작했다.

1996년 동학농민혁명태안군기념사업회 창립에 적극 관여한 후로 태안의 동학에 대해 많은 생각과 연구를 거듭하면서 나의 자괴감은 더욱 커졌다. 나는 마침내 백화산 교장바위의 원래 이름은 '校長'이 아닌 '絞杖'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물론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문헌상의 확실한 기록은 없다. 기록은 없지만, 동학농민혁명 당시에 동학농민혁명군 참살과 관련하여 '絞杖 바위'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사실은 얼마든지 논증이나 유추가 가능하다.


a 갑오동학농민군추모탑  충남 태안의 백화산은 갑오동학농민군이 마지막까지 항전했던 곳이다. 일본군에게 생포된 동학농민군은 백화산 교장바위 위에서 처참하게 살육을 당했다. 그 일을 길이 기억하고,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1978년 피어린 현장에 추모탑을 건립했다.

갑오동학농민군추모탑 충남 태안의 백화산은 갑오동학농민군이 마지막까지 항전했던 곳이다. 일본군에게 생포된 동학농민군은 백화산 교장바위 위에서 처참하게 살육을 당했다. 그 일을 길이 기억하고,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1978년 피어린 현장에 추모탑을 건립했다. ⓒ 지요하


나는 2004년에 그 사실을 구체적으로 논증하는 글들을 써서 <태안신문>과 <오마이뉴스>에 발표했다. '태안 백화산 '교장바위' 이야기' '絞杖과 校長 사이에서'와 '태안 백화산 교장(校長)바위는 '絞杖'이 맞다'라는 글이다. 그 후에도 나는 '동학농민혁명군과 태안 백화산' 등 동학 관련 글을 여러 개 쓰면서 태안 동학농민혁명군의 역사가 담긴 '絞杖 바위'의 원래 이름을 복원해야 할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제기했다. 생전에 내 글을 읽으신 박국환 선생께서도 내 논증과 의견에 전적으로 찬동하셨다.

하지만 태안군에서는 '絞杖 바위'에 관한 확실한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현재의 '校長 바위' 안내판을 바꾸지 않고 있다. 기록이 중요하긴 하지만 모든 세상사가 기록으로만 증명되는 것은 아닌데도 말이다. 또 '校長 바위'에 관한 얘기도 확실한 기록이 아닌 한갓 '설(說)'일 뿐이건만…. 행정에 융통성이 없는 것이야 익히 알지만, 참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송길성 선생의 지적대로 현재의 '校長 바위' 안내판이 바로 아래 '갑오동학농민혁명군추모탑''과 부조화를 이루고 있는 현상, 동학혁명의 웅혼한 기상을 간직하고 있는 태안의 풍모와 매우 걸맞지 않는 것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는 것이다.

나는 2007년 공주의 우금티동학농민전쟁기념사업회의 청탁을 받고 <저 바위에는 꽃이 피네>라는 장막 희곡을 쓴 적이 있다. 3막 12장으로 구성된 그 희곡에는 오늘의 백화산 '교장바위' 관련 현상과 1920년대 말 일제 때의 태안 풍경, 1895년 2월 태안동학농민혁명군 진압시기의 참상 등이 교차하듯 얼개를 이루고 있다.

일제가 창씨개명과 조선어말살정책을 시행하기 전 내선일체(內鮮一體)와 황국신민(皇國臣民)을 목표로 분위기 조성 차원에서 일시적으로 유화정책을 시행하던 때 태안 백화산의 '絞杖 바위'를 교묘하게 '校長 바위'로 환치시키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묘파하고 있다. 나는 그 희곡을 공주 우금티동학농민전쟁기념사업회의 허락을 얻어 2011년 <소설충청> 제19호에 발표하기도 했다. 

a 백화산 교장바위 안내판 태안 백화산 교장바위 안내판을 바꿔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한 상황이다. 갑오동학농민혁명군이 처참하게 살육된 곳이라서 '교장(絞杖)바위'라는 이름이 생겼지만, 안내판은 일제 때 태안보통학교 일본인 교장선생님의 미담을 소개하며 그 미담에 의해 '교장(校長)바위'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백화산 교장바위 안내판 태안 백화산 교장바위 안내판을 바꿔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한 상황이다. 갑오동학농민혁명군이 처참하게 살육된 곳이라서 '교장(絞杖)바위'라는 이름이 생겼지만, 안내판은 일제 때 태안보통학교 일본인 교장선생님의 미담을 소개하며 그 미담에 의해 '교장(校長)바위'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 지요하


나는 우리 고장 태안의 최고 자랑으로 동학농민혁명을 꼽는다. 문화적으로는 국보인 백화산 마애삼존불이 있지만, 역사적으로는 동학농민혁명 외로 내세울만한 게 아무것도 없다. 인물 쪽으로 3·1만세운동 33인 중의 한 분인 이종일 선생을 꼽는 이들이 많지만 33인 중에서 만해 한용운 선생을 빼고는 모조리 변절을 한 사실과 관련하여 볼 때 미덥지 않은 점도 있다. 하지만 우리 고장에는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와 기상이 있기에 나는 태안 사람으로서 옹골찬 긍지를 갖는다. 아울러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에 대한 의무감을 항시 지니고 산다.

지난 17~18 양일간 충북 보은(報恩)에서 열린 '동학농민혁명 119주년, 제9회 전국기념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동학의 고장인 보은의 잘 조성된 유적지들과 기념물들을 자세히 둘러보고, 또 귀로에는 예산의 4000여 평에 달하는 추모공원을 살펴보면서 한편으로는 몹시 부러운 가운데서도 동학농민혁명의 고장 태안의 위상, 태안인으로서의 긍지를 다시 한 번 되새겨볼 수 있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충남 태안의 <태안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백화산 교장바위 #갑오동학농민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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