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황후(하지원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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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국이 신하국에서 궁녀를 충원한 것은 궁녀를 모으기가 그만큼 힘들었기 때문이다. 황제국이든 신하국이든, 궁녀를 모으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다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이런 일을 신하국에 떠넘긴 것이다.
어떤 사극에서는 궁녀가 선망의 대상이었던 것처럼 묘사되지만, 실제로 궁녀는 노예 혹은 노비와 다를 바 없었다. 궁녀는 자유인 신분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중노동을 해야 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여성들은 궁녀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궁녀를 청와대 여직원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일반 백성들은 궁녀 직업을 기피했지만, 궁궐에서는 어떻게든 궁녀를 확보해야 했다. 궁궐에 일손이 많이 필요한 경우에는 강제로 궁녀를 모집하기도 했다. 이때마다 민간에서는 거센 저항이 나타나곤 했다.
예컨대, 조선 효종 4년 9월 24일자(음력) 즉 1653년 11월 13일자(양력) <효종실록>에 따르면, 궁녀 지원자들이 나타나지 않자 국가에서는 관리들을 풀어 민간 여성들을 잡아갔다. 그러자 민간에서 소요 수준의 저항이 나타나고 어린 딸을 서둘러 결혼시키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흔히, 조혼 풍습은 공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생긴 풍습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조혼 풍습은 공녀뿐만 아니라 궁녀로도 끌려가지 않기 위해 생긴 풍습이었다. 백성들은 남의 나라 궁궐뿐만 아니라 자기 나라 궁궐에 끌려가는 것도 원치 않았다. 백성들이 이 정도로 궁녀를 기피했기 때문에, 조선왕조의 경우에는 공노비(관노비) 중에서 궁녀를 충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궁녀가 되면 왕을 유혹해서 왕비가 될 기회가 생기지 않느냐?'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상당수의 궁녀는 평생토록 왕의 근처에 가지도 못했고, 어쩌다 왕의 관심을 끈다 해도 왕비나 후궁에 의해 목숨을 잃기 쉬웠다. 궁녀 신분으로 왕비가 된 장희빈은 매우 이례적인 인물이었다. 구한말 궁녀들의 증언을 수록한 역사학자 김용숙의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에 따르면 고종의 눈길을 받은 궁녀가 다음 날 어디론가 사라지는 사례가 많았다고 한다.
이렇게 궁녀를 뽑는 일이 힘들었기 때문에, 황제국은 자국민들의 저항을 피할 목적으로 신하국에 공녀를 요청했다. 신하국은 자기 나라 궁궐에 들일 궁녀뿐만 아니라 황제국 궁궐에 들일 궁녀까지 뽑아야 했으니,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공녀와 궁녀는 실상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궁궐 일꾼이라는 점에서 양자는 똑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공'과 '궁'이 점 하나 차이인 것과 같았다. 여담이지만, 공녀의 '공'에는 점(ㅗ)이 위쪽에 찍혀 있고, 궁녀의 '궁'에는 아래쪽에 점(ㅜ)이 찍혀 있다. 고려시대 여인들을 포함해서 역대 한민족 여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공녀는 위쪽 즉 북쪽 궁궐로 가는 여인이고 궁녀는 그냥 이쪽 궁궐로 가는 여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