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동포 이산가족들의 상봉 장면(평양 고려호텔에서)
신은미
문득 남과 북에 있는 이산가족들이 떠오른다. 그분들의 심정을 생각하니 미안하고 죄스럽다. 피를 나눈 혈육들이 상봉은커녕 생사조차 모른 채 한 분 두 분 한 많은 삶을 마치고 있다. 해외동포들은(하다못해 나 같은 '양엄마' 마저도) 원한다면 누구든지 북한에 가 헤어진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는데, 왜 남과 북의 이산가족들은 서신조차 주고받지 못하는 걸까.
나는 첫 북한여행 이후 통일과 관련된 글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전공인 음악에 관한 책을 놓은 지 꽤 오래인 내가 통일과 관련된 글을 읽는다는 것은 대단한 각오를 요구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남북관계·북미관계·새터민 등 단어만 떠올려도 머리가 아프고 졸음부터 올 것이라 생각했던 통일 관련 글들은 매우 흥미로웠다.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역시 관심이 있으니 흥미가 생기나 보다.
나는 내 나름대로 '왜 남북관계는 정권에 따라 영향을 받으며, 북미 평화협정은 왜 체결되지 않는지'에 대한 이유를 생각해 보기도 했다. 남한의 보수정권과 미국의 대북정책에는 공통점이 있어 보인다. 그것은 '북한은 곧 붕괴한다'는 가정 아래 그들의 정책이 수립됐다는 점이다.
그간 나는 북미관계에 있어서 북한이 항상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들어왔다. 그러나 사실 그렇지만도 않다는 걸 알게 됐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북한이 지키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고 말했으며, 심지어 부시 행정부의 콘돌리자 라이스 전 국무장관은 "미국은 마치 축구 경기 도중 불리해지자 골대의 위치를 바꾼 격"이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어디 그뿐인가.
최근까지 오바마 행정부에서 일했던 제프리 베이더는 "한마디로 전략적 인내라는 미국의 대북정책은 곧 북한이 붕괴할 때를 기다리며 지연작전을 펴는 것이었다"고 그의 저서 <Obama and China's Rise>에서 고백하고 있다. 그러니 북한의 붕괴가 가시화되지 않을 경우, 미국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여러 가지 약속을 지킬 수 없었던 모양이다. 어찌 됐든 미국 입장에서는 정책의 실패를 맛봤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정책 목표인 '북한의 비핵화'는커녕 북한은 핵무장을 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남한의 보수정권 역시 '북한 지원을 끊으면 그들은 몇 년 안에 붕괴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동시에 북한의 개방도 요구한다. 그러나 실제로 북한이 개방 정책을 펴 잘사는 나라가 되면 좋겠다는 바람보다는 개방으로 인한 북한의 체제변화 혹은 붕괴에 그 목적이 있는 것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므로 북한에서 체제변화나 붕괴의 조짐이 없다면, '북한 정권의 붕괴'라는 가정 아래서 생겨난 정책은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북한 주민에게 지역 격차 물어봤더니...북한 사회에 관한 수많은 연구들 또한 객관적인 판단을 힘들게 한다. 대개 새터민들의 말에 많이 의존하기 때문이다. 물론 새터민들이 남한에 와 내놓은 증언 중 북한에서의 궁핍한 생활이나 고난에 대한 증언은 상당수가 사실일 것이다. 나 역시 북한을 여행하는 도중, 그들의 가난을 수차례 봐왔다. 하지만, 일부 새터민들의 증언이 북한 사회 전체를 그대로 보여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난해 5월, 라진-선봉을 여행하던 중 한 북한 주민과 나눴던 대화가 떠오른다.
"북에서 느낀 건데, 평양과 지방의 격차가 너무 심한 것 같아요. 생활 수준도 차이가 나는 것 같고…."그러자 그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지방이 어떻게 평양과 같을 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수도의 시민은 그렇게 살 자격이 있습니다."우연히 만난 이 북한 주민이 진심에서 우러나와 그런 말을 한 것인지, (보통 남한 사람들이 생각하듯) '누가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라'는 교육을 받고 그런 말을 한 것인지 알 도리는 없다. 하지만, 만일 이 주민의 말이 진실이었다면 '과연 이런 사회가 생각처럼 쉽게 무너질 수 있을까'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언론들은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에 수백만의 북한 주민들이 기아로 목숨을 잃었다고 보도한다. 그런데 북한은 붕괴했는가? 북한은 여전히 건재하며 붕괴할 기미는 지금까지도 보이지 않는다. 당시 수백만의 인명 피해를 고려해 볼 때 현재 남한에 살고 있는 새터민 수 2만5000명은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살고 있는 미국에서 수백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했다면 아마도 수천만 명이 캐나다나 멕시코로 '탈미'할 것이다.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고도 북한은 붕괴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냉정하게 생각해보고 연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연구를 통해 정책이 나와야 한다.
관광객 신분으로 북한을 본 내가 그 사회를 이렇다 저렇다 판단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내가 경험한 북한은 아무리 가난에 허덕이고 있다고 해도 결코 일순간 와르르 붕괴될 것 같지는 않다. 한 사회가 붕괴될 때에는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서 정신적인 타락이나 나태 혹은 침체가 먼저 시작된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본 북한 주민들에게는 그들만의 뭔가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도저히 알 수 없는, 혹 안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성격의 것이다. 나는 확실히 말할 수 없는 그 뭔가가 지금의 북한을 지탱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내 눈에 비친 북한은 전 국토가 요새화돼 있고, 최악의 경우에는 수백만 명이 결사항전을 벌이는, 한마디로 '빨치산 국가'(partisan state)였다.
얼마나 더 많은 북한 동포들이 죽어야 하나요만약 북한에 가해진 경제제재마저 풀려 북한이 본격적으로 국제 경제에 참여하게 된다면, 붕괴는커녕 경제성장을 구가할 것이라 생각한다. 1960년대 남한의 경제성장을 이야기할 때, 대부분 값싼 노동력이 경제성장의 원동력이라고 평가하곤 한다. 지금의 북한은 양질의 값싼 노동력은 물론이고 당시 남한이 갖고 있지 못했던 풍부한 지하자원 그리고 기술도 갖추고 있다. 경제대국이 된 남한조차 자력으로 인공위성을 띄우지 못하고 있지만, 북한은 이미 오래전에 그것을 성공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그만큼 북한에도 기술이 있다는 이야기다. 남과 북이 대규모 경제협력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면 남한에게도 반드시 이득이 생길 것이다. 놀라운 경제 도약을 다시 한 번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남과 북의 경제성장도 좋지만, 날 가슴 벅차오르게 하는 진짜 이유는 남북 경제 협력 과정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감격적인 상황 때문이다. 우리 민족, 남과 북이 비로소 마음을 합치고, 서로를 보듬어 안으며 살 길을 찾아 함께 나서는 역사적인 상황 말이다. 이 여행기를 읽는 이들에게 제안하고 싶다. 이제 '좌빨' '수꼴' '종북' '반북' 같은 논할 가치 없는 무개념 단어들을 남발하지 말자.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는' 마음으로 '통일'을 논하자. 그렇게 한다면 아름다운 겨레의 정신을 실천에 옮겨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돼 살아가는 우리 민족의 모습을 그리자.
누군가가 북한의 붕괴를 상상하고 있다면 묻고 싶다. '얼마나 더 많은 북한의 동포들이 목숨을 잃어야 북한이 붕괴된다고 생각하는지' 말이다. 오백만 명? 천만 명? 그렇게 많은 동포들이 죽어가며 얻는 '북한의 붕괴'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몇몇 사람들은 마치 북한이 붕괴되면, 남한이 이를 흡수해 통일을 이루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꼭 그렇게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북한은 유엔에 정식으로 가입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유엔 가입국이 다른 나라에 흡수되거나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북한의 붕괴가 통일을 더 어렵게 만들 수도 있다. 그리고 북한의 경제발전이 통일에 더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점도 알아야 한다. 소위 '통일 비용'이라는 것도 남북간의 경제격차가 벌어지면 벌어질 수록 늘어날 게 뻔한 일 아니겠는가.
이제 '북한은 곧 붕괴할 것'이라는 가정을 버리고 민족 그리고 통일을 바라보자. 대개 우리는 한민족을 '전쟁의 폐허 속에서 세계적인 경제 강국을 건설한 훌륭한 민족'이라고 소개한다. 북한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그런 민족적 역량을 동일하게 지닌 사람들이다. 하루 빨리 남북관계가 좋아져서 가물에 콩 나듯 백여 명씩 만나는 이벤트성 이산가족 상봉이 아닌 수만 명이 대규모로 상봉하는 날이 오길 바란다. 이 정도면 금세기 최고의 휴먼드라마가 되지 않을까. 민족의 지혜가 절실히 요구된다.
설경이를 만나고 되돌아오는 시간 내내 안타까운 심정이 가시질 않는다. 양 갈래로 갈라진 내 조국의 서글픈 모습에 내 애절한 심정까지 더해지니 이런저런 생각들이 뿜어져 나온다.
남한식 '폭탄주' 마신 영길 동생, 반응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