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희망으로 응답한 '민주주의자 김근태'

[김근태 2주기 추모글] 28일 오후6시 서울시청에서 추모콘서트

등록 2013.12.27 16:22수정 2013.12.27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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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멸감을 느끼는 순간은 대개 사소하다. 그 때 난 길가 벤치에 앉아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중전화 부스에서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내 앞으로 10원짜리 동전 하나가 외발자전거처럼 굴러갔다. 동전 주인의 눈길도 동전을 쫓고 있었다. 재주를 다 부렸다는 듯 동전은 가까운 곳에 멈췄지만 주인은 돌아서서 가버렸다. 나는 남겨진 동전과, 동전이 그린 궤적과, 멀어지는 그를 바라보았다. 1994년 신촌에서였다.

"이 사람들아, 대통령 적선제가 아니란 말이야"

2012년 12월 19일 대선이 끝난 후 며칠 간, 끝내 투표권을 행사하지 않은 20대들에 대하여 쓴소리를 내뱉고 싶은 '꼰대' 다운 충동에 시달렸었다. 어디선가 "땡그랑"소리가 들려왔다. '이 사람들아, 대통령 적선제가 아니란 말이다'라며 혼자 속을 끓였다. 그리고 페이스북 담벼락에 "민주주의에서 국민은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대통령을 갖는다"는 19세기 프랑스의 정치이론가 토크빌의 말을 새겨놓았다. 한심하고 비겁한 짓이었다. 아픔을 과장했고 사람들을 모욕했으며 민주주의를 냉소했다.
모멸감의 부피와 질량은 그 사람의 인격에 값한다. 김근태가 그렇다. 김근태는 2008년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누군가 해야 한다면 김근태가 하겠습니다'라는 글에 이렇게 적었다.

 양손에 포승줄을 한 채 밝은 미소를 짓는 김근태
양손에 포승줄을 한 채 밝은 미소를 짓는 김근태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1950년대 영국의 한 저널리스트가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는 것"이라고 한 말을 저는 도저히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말을 떠올릴 때마다 저는 분노와 모멸감에 몸서리쳐야 했습니다."

'영국의 한 저널리스트'의 말은 저주였던가. 박근혜 정권이 내세우는 '자랑스러운 불통'이야말로 '장미꽃'이 필 수 없는 '쓰레기통'이 아닌가.

지금 정권은 지난 5년도 시원치 않았다는 듯 전력을 기울여 '잃어버린 10년'에 대한 '복원' 작업에 나서고 있다. 그들이 설정한 '복원지점'은 한 세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이 '불통 능력'과 '물리력', '인력'을 동원해 과거를 복원할 동안 야당은 "민주주의의 후퇴, 퇴보"를 외쳐왔다.

그런데 민주주의 자체가 후퇴할 수 있는 것일까? 민주주의가 후퇴할 수 있는 '최저선'따위가 존재한단 말인가? 혹시 후퇴한 건 민주주의가 아닌 다른 게 아닐까?


<김근태 평전>을 쓴 김삼웅은 김근태에게 민주주의는 수단이고 외피였다고 말한다. 민주주의라는 수단을 통해 김근태가 추구한 본원적 가치는 '인간의 존엄'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린 이제 '민주주의자 김근태'를 '아름다운 인간 김근태'라 읽어도 될지 모른다.민주주의자 김근태는 끊임없이 회복하는 인간이었다. 남영동 대공분실의 살인 고문을 견뎌내고 군사독재의 재판정에 섰을 때 김근태는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온몸으로 '회복'을 선언했다.

"이제 본인은 징역을 산다. 높은 담과 부자유, 징역의 외로움과 슬픔을 뚫으며 살 것이다. 쇠창살 너머 하늘의 별에서 윤동주 시인의 눈물을 만나며 이 징역을 살 것이다. 1985년 9월 정치군부의 고문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를 달래며 회복하는 과정으로서 징역을 살 것이다. 1980년 5월 부릅뜬 눈으로 정치군부의 총칼에 의해 아스팔트에 쓰러졌던 망월동 시민들의 원혼의 통곡 소리를 들으며 징역을 살 것이다. 이 징역 속에서 민주화의 그날을 꿈꾸며 징역을 깨면서 살 것이다."(1986년 3월 16일 서울형사지법 178호 법정에서 열린 1심 공판에서 김근태가 한 최후진술의 마지막 부분)


김근태는 식민지 시인 윤동주를 호명하며 "징역을 깨"나갔다. 그런데 감방 한 쪽 어둠 속에 또 다른 시인이 있었다. 김근태는 1986년 3월 11일 서울구치소에서 부인 인재근에게 두 번째 편지를 썼다.

"컴컴한 동굴 속에 자리를 차지하고 한편으로는 굴 입구에 나타날 수상쩍은 적을 경계하면서 상처가 아물도록 자꾸 혀를 핥는 것이었다오. 그러나 나는 안심이 되지 않아 이불 속으로 이불 속의 컴컴함으로 더욱 기어 들어갔다오. <오감도> 속의 이상(李箱)처럼 나는 점점 이상해져 갔다오. 아, 나는 이때 정말 누군가의 체온 그것을 갈망하였다오. 인간의 목소리, 사랑이 담긴 그 눈빛을 나는 고대하였던 것이오."(<이제 다시 일어나>(중원문화사, 1987), 177쪽)

김근태는 윤동주와 더불어 빛나는 지사였고, 이상과 더불어 고뇌하는 개인이었다. 과문한 나는 김근태 이외에 시인의 영혼을 살아냈던 정치인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김근태가 떠난 지금 나는 백석의 시에서 "굳고 정한" 그의 모습을 오롯하게 만난다.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디 먼 산 뒷옆에 바우 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오는데 하아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마지막 부분

"희망은 힘이 세다"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64세로 별세한 가운데, 2011년 12월 3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 영정사진이 놓여져 있다.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64세로 별세한 가운데, 2011년 12월 3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 영정사진이 놓여져 있다.유성호

우린 회복하는 인간이다. 우리에겐 회복하는 힘이 있다. 우리의 권리, 우리의 존엄, 우리의 삶을 회복하자. 김근태라면 "더 나은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면 더 나은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으리라.

"이제 다시 일어나 희망의 근거를 만들자. 희망은 힘이 세다."

그래서 냉소가 아니라 위로를, 고함이 아니라 고백을, 홀로가 아니라 서로를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런 취약함을 고백하는 속에서의 약함의 연대가 함께할 때마다 우리의 강한 연대인 신념과 이상이 오만과 허위의 나락에 떨어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럴 때마다 우리는 저 앞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야 구원이 있을 수 있습니다."(김근태, <열려진 세상으로 통하는 가냘픈 통로에서>(한울, 1992), 227쪽)

2011년 10월 18일 김근태는 홈페이지에 <2012년을 점령하라>는 글을 올렸다. 이 글은 12월 30일 영면에 들어간 그가 세상에 내놓은 마지막 글이 되고 말았다.

"최선을 다해 참여하자.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

민주주의엔 '복원지점'이 없다. 오직 '민주화의 길' 만이 있을 뿐. 그 길에서 우린 오직 희망으로 응답할 뿐. 오직 연대하고 참여하고 회복할 뿐.

2013년 12월 30일은 민주주의자 김근태의 2주기 추모일이다. 그를 그리워 하는 사람들이, 그와 함께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김근태와 따뜻한 국 한 그릇 나누시라고' 알려드린다는 그의 아내 인재근 의원의 마음이 따뜻하다.

추도미사 및 추도식 : 12월 28일 오전 10시 창동성당
묘역참배 : 12월 28일 오후 1시 마석 모란공원 묘역
2주기 콘서트 : 12월 28일 오후 6시 서울시청 다목적 홀 (함께하는 사람들 : 장사익, 더숲트리오, 인재근, 도종환, 권해효, 우리나라, 노래하는 나들, 배해선, MC한새, 그리고.......)
행사안내 : 02-3143-7709 facebook.com/thinkofgeuntae
덧붙이는 글 필자는 1972년 서울에서 남. 한양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중국 연변대학에서 일제강점기 만주 망명 시인을 연구하여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양대, 인하대에서 글쓰기와 문화읽기를 가르친다.
#김근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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