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손에 포승줄을 한 채 밝은 미소를 짓는 김근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1950년대 영국의 한 저널리스트가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는 것"이라고 한 말을 저는 도저히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말을 떠올릴 때마다 저는 분노와 모멸감에 몸서리쳐야 했습니다."
'영국의 한 저널리스트'의 말은 저주였던가. 박근혜 정권이 내세우는 '자랑스러운 불통'이야말로 '장미꽃'이 필 수 없는 '쓰레기통'이 아닌가.
지금 정권은 지난 5년도 시원치 않았다는 듯 전력을 기울여 '잃어버린 10년'에 대한 '복원' 작업에 나서고 있다. 그들이 설정한 '복원지점'은 한 세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이 '불통 능력'과 '물리력', '인력'을 동원해 과거를 복원할 동안 야당은 "민주주의의 후퇴, 퇴보"를 외쳐왔다.
그런데 민주주의 자체가 후퇴할 수 있는 것일까? 민주주의가 후퇴할 수 있는 '최저선'따위가 존재한단 말인가? 혹시 후퇴한 건 민주주의가 아닌 다른 게 아닐까?
<김근태 평전>을 쓴 김삼웅은 김근태에게 민주주의는 수단이고 외피였다고 말한다. 민주주의라는 수단을 통해 김근태가 추구한 본원적 가치는 '인간의 존엄'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린 이제 '민주주의자 김근태'를 '아름다운 인간 김근태'라 읽어도 될지 모른다.민주주의자 김근태는 끊임없이 회복하는 인간이었다. 남영동 대공분실의 살인 고문을 견뎌내고 군사독재의 재판정에 섰을 때 김근태는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온몸으로 '회복'을 선언했다.
"이제 본인은 징역을 산다. 높은 담과 부자유, 징역의 외로움과 슬픔을 뚫으며 살 것이다. 쇠창살 너머 하늘의 별에서 윤동주 시인의 눈물을 만나며 이 징역을 살 것이다. 1985년 9월 정치군부의 고문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를 달래며 회복하는 과정으로서 징역을 살 것이다. 1980년 5월 부릅뜬 눈으로 정치군부의 총칼에 의해 아스팔트에 쓰러졌던 망월동 시민들의 원혼의 통곡 소리를 들으며 징역을 살 것이다. 이 징역 속에서 민주화의 그날을 꿈꾸며 징역을 깨면서 살 것이다."(1986년 3월 16일 서울형사지법 178호 법정에서 열린 1심 공판에서 김근태가 한 최후진술의 마지막 부분)
김근태는 식민지 시인 윤동주를 호명하며 "징역을 깨"나갔다. 그런데 감방 한 쪽 어둠 속에 또 다른 시인이 있었다. 김근태는 1986년 3월 11일 서울구치소에서 부인 인재근에게 두 번째 편지를 썼다.
"컴컴한 동굴 속에 자리를 차지하고 한편으로는 굴 입구에 나타날 수상쩍은 적을 경계하면서 상처가 아물도록 자꾸 혀를 핥는 것이었다오. 그러나 나는 안심이 되지 않아 이불 속으로 이불 속의 컴컴함으로 더욱 기어 들어갔다오. <오감도> 속의 이상(李箱)처럼 나는 점점 이상해져 갔다오. 아, 나는 이때 정말 누군가의 체온 그것을 갈망하였다오. 인간의 목소리, 사랑이 담긴 그 눈빛을 나는 고대하였던 것이오."(<이제 다시 일어나>(중원문화사, 1987), 177쪽) 김근태는 윤동주와 더불어 빛나는 지사였고, 이상과 더불어 고뇌하는 개인이었다. 과문한 나는 김근태 이외에 시인의 영혼을 살아냈던 정치인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김근태가 떠난 지금 나는 백석의 시에서 "굳고 정한" 그의 모습을 오롯하게 만난다.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디 먼 산 뒷옆에 바우 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오는데 하아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마지막 부분 "희망은 힘이 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