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가 된 성당, 전설이 된 선종완 신부

[박물관과 미술관 기행 14] 용소막 성당의 선종완 사제 유물관

등록 2014.01.29 10:48수정 2014.03.23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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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소막 성당
용소막 성당이상기

가톨릭 사제의 삶을 조명한 박물관이 있다.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용암리 용소막 성당에 있는 선종완 라우렌시오 사제 유물관이다. 나는 유물관을 찾아 용소막 성당으로 갔다. 마침 일요일이어서 미사가 열리고 있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 잠깐 미사에 참례했다. 마지막 성가가 불려지고 있다. 신부님이 제대 앞에 서서 노래를 부르고 그 앞에 복사들이 서 있다. 신자들도 모두 일어서 성가를 부른다.

성당 안은 단순 소박하다. 고딕식답게 천정을 지탱하는 골조가 드러나 있고, 제대 뒤 벽에 십자가 고상만이 설치되어 있다. 창문의 스테인드글라스 역시 대상을 최소화했다. 창문 사이로는 십자가의 길(Via Cruise) 14처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그 설명이 옛날식이다.


'제1처: 비라도 예수를 죽을 죄인으로 정함이라. 제14처: 예수의 성시를 장사 함이라.'

이를 통해 우리는 용소막 성당의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용소막 성당의 정면
용소막 성당의 정면이상기

용소막(龍沼幕) 성당은 1904년(고종 41년) 5월 4일 프와요(Poyaud) 신부가 부임하면서 본당으로 설정되었다. 풍수원 성당, 원주 성당에 이은 강원도 세 번째 본당이다. 성당은 루르드의 성모에게 봉헌되었고, 원주 동북쪽 강원도와 충청도 지역을 관할했다. 원주군 일부, 평창군와 영월군, 제천군과 단양군 등 5개군 17개 공소가 용소막 성당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시잘레(Chzallet) 신부에 의해 1915년 완공되었다. 당시 신자수가 30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성당은 고딕식 벽돌 건축으로, 전면 중앙에 3층 종탑이 있는 3량식 건물이다. 2층에는 성가대석이 있다. 제단이 있는 후면은 8각형의 평면으로 되어 있으며, 서쪽 면에 제의실이 있다. 내부 기둥은 비교적 가는 팔각형 목조로 되어 있고, 기둥 안쪽으로 신자들의 의자를 설치했다.

천정은 목조 반원형 아치로 단순하게 처리했다. 천정과 벽은 모두 흰색 회벽이다. 그리고 바닥에는 마루를 깔아 신발을 벗고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용소막 성당은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6년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6호가 되었다.


선종완 라우렌시오 신부의 공부 이야기

 선종완 라우렌시오 신부 동상
선종완 라우렌시오 신부 동상이상기

미사가 끝나 성당을 나온 나는 아내와 선종완 라우렌시오 사제 유물관을 보러 간다. 그런데 문이 닫혀 있고, 수녀님 전화번호가 적혀 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곳을 관리하는 수녀님이 미사에 참석한 것이었다. 미사가 끝났으니 수녀님이 곧 오겠지 하고 잠시 기다린다. 그러면서 나는 유물관 정면 왼쪽에 있는 선종완 라우렌시오 신부님 동상과 신부님을 소개하는 동판을 살펴본다.


선종완 신부는 왼손에 성서를 들고 오른손을 살짝 들어 올리고 있다. 약간 대머리에 안경을 쓴 모습이다. 선종완 신부가 62세에 선종했으니 50대 후반 모습이 아닐까 추정해 본다. 선종완 신부는 1915년 8월 용소막 성당이 있는 신림면 용암리 544번지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가톨릭 신자 집안이면서 양조장을 하는 부잣집 아들이었다. 그래서 태어난 지 3일 만에 영세를 받았고, 1921년에는 첫 영성체를 하고 복사로 미사에 참여한다. 1922년 신림보통학교에 입학하면서 그는 신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로마 우르바노대학 졸업장
로마 우르바노대학 졸업장이상기

1930년 3월 소신학교에 입학하면서 그의 신부로의 길이 시작된다. 1932년 그는 부모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입회한다. 선 신부의 부모는 자식이 소신학교를 졸업하고 가업을 계승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선 신부는 1934년 수도원을 나와 신학교에 재입학한다. 신학교를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선 신부의 순수성과 청빈함을 잘 알고 있는 선생들이 재입학을 허용했다고 한다.

1936년 4월 경성신학교에 입학했고, 1942년 2월 용산 성심신학교를 졸업했다. 2월 14일 사제 서품을 받은 선종완 라우렌시오 신부는 춘천교구에서 잠깐 사목활동을 하다, 3월 일본 도쿄로 유학해서 중앙대학 경제학과에 다닌다. 그리고 1945년 5월 휴학을 하고 귀국해 경성 성신학교 교수로 취임한다. 1947년 5월에는 성신대학 교수가 되었다가, 공부를 위해 1948년 9월 로마의 우르바노 신학대학 4학년에 편입한다. 1949년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안젤리쿰대학, 성서대학 신학연구과에서 2년간 공부하고 1951년 6월 석사학위를 받았다.

 예루살렘 성지 방문증
예루살렘 성지 방문증이상기

그리고는 다시 이스라엘로 가 예루살렘 성 서얀두 대학원에 다니면서 성서고고학에 대해 공부하고 또 성지순례를 했다. 그가 예루살렘에 가 공부한 것은 그가 평생의 업으로 삼은 성서번역의 튼튼한 뿌리가 되었다. 그는 히브리어 성서를 토대로 구약과 신약을 우리말로 번역한 최초의 신부이기 때문이다. 한국 천주교사에서 성경은 한문을 통해 처음 수용되었고, 그것이 라틴어, 그리스어로 확대되고, 마지막에 히브리어까지 확장된 것이다.        

그는 성서번역의 전설이 되었다

1952년 6월 성서고고학 과정을 수료하고 귀국한 선종완 신부는 9월 가톨릭대학 신학과 교수로 복직한다. 그리고 죽는 날까지 성서 번역에 온 힘을 쏟는다. 그는 1954년 4월부터 1955년 3월까지 잠시 횡성과 소양로 교회 주임신부를 맡았다. 그리고는 다시 가톨릭대학 교수로 돌아와 성서번역을 시작했고, 1958년 7월 구약성서 제1편 창세기를 우리말로 펴낸다. 이때부터 구약성서는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이름으로 나왔으며, 주해까지 있어 성서학자들에게 훌륭한 안내서가 되었다.

 천주교 중앙협의회에서 나온 구약성서
천주교 중앙협의회에서 나온 구약성서이상기

그는 또한 1955년 10월부터 1960년까지 가르멜수녀원 고백신부로 근무한 인연으로, 1960년 3월 25일 경기도 부천에서 성모영보수도원을 설립했다. 선 신부는 수도원을 살리기 위해 메추리를 사육하기도 했다. 다행히 당시 메추리알 값이 좋아 수도원 경제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성모영보수녀원은 1967년 6월 과천으로 이전을 했고, 1975년 용인군 이동면에 수련원을 준공하면서 활동영역이 더 넓어졌다. 그 후 과천의 수녀원이 도시화로 인해 수용되면서 성모영보수녀원은 이동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1965년 원주교구가 설립되면서 선종완 라우렌시오 신부는 원주교구 소속 신부가 되었고, 1967년 사제서품 25주년이 되어 은경축을 맞았다. 1968년에는 신구약 공동번역 성서 작업을 위한 가톨릭측 전문위원으로 위촉되었고, 또 다시 성서번역에 심혈을 기울인다. 그는 구약 번역작업에 참여했는데, 하루에 두세 시간만 자고 번역에 몰두했다고 한다. 그는 또한 꼼꼼하기 이를 데 없어 1955년부터 1968년까지 남긴 교정원고와 1968년부터 1976년까지 남긴 교정원고가 유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전자는 손으로 쓰고 교정을 보았으며, 후자는 타자로 친 원고에 교정을 보았다.

 구약성서 교정본
구약성서 교정본이상기

그러한 노력의 결과 1976년 구약성서 번역이 완료되었고, 7월 10일 원고교정까지 모두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7월 11일 오후 3시 30분 명동 성모병원에서 간암으로 선종했다. 그는 임종을 지켜 본 수녀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자매 여러분, 항상 마음을 합심하여 어려움을 잘 참고 모든 고통 중에 인내하며 하느님 사랑 안에 서로 모였으니까 끝까지 겸손하며 가난해야 되고 하느님 사랑으로 남에게 봉사하며 서로 자기를 내세우지 말고 겸손되이 살아야 합니다."

 선종완 신부 사진
선종완 신부 사진이상기

선종완 신부는 죽으면서까지 겸손과 가난, 사랑과 봉사를 강조했다. 사실 이 말은 그가 평생 지켜온 삶의 자세이기도 했다. <말씀으로 산 사제> 69쪽에 보면, 그가 "나는 청빈에 관한 한 하느님 앞에 심판을 받지 않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한 것을 알 수 있다. 청빈과 가난이 몸에 배었고, 겸손하게 봉사하는 자세를 결코 잊지 않았다. 그는 또 <에베소서> 4장 15절에 따라 '사랑 가운데서 진리대로 살' 것을 강조하고 있다.       

신금순 요세피나 수녀님을 통해 알게 된 선종완 신부 이야기

 유물관 내부 선종완 신부 유품
유물관 내부 선종완 신부 유품이상기

유물관 근처에 있던 수녀님이 연락을 해, 잠시 후 유물관을 담당하는 신금순 요세피나 수녀님이 나타났다. 수녀님은 반갑게 우릴 맞이하면서 유물 관 안으로 안내한다. 그 전에 유물관을 방문한 적이 있어 모든 게 낯이 익다. 신 수녀님은 전시된 유물을 중심으로 선종완 신부의 삶과 종교성 그리고 학술적인 활동 등을 이야기한다. 나는 수녀님을 따라가면서 선 신부의 학위증, 1958년 이후 발행된 구약성서 등을 살펴본다.

그리고 로마와 유럽,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성지를 다니며 수집한 물건들을 살펴본다. 그 다음에는 선종완 신부가 착용하고 사용했던 의류와 신발, 시계, 전화기, 타자기, 사진기와 라디오 등을 살펴본다. 선종완 신부는 또한 음악과 미술에도 관심이 많아 피아노도 배우고 그림도 그렸다고 한다. 그래선지 이곳에는 음악을 듣기 위한 턴테이블이 남아 있고, 성지 순례를 하면서 그린 지도와 그림이 여러 점 있다.

 용소막 성당 미사
용소막 성당 미사이상기

선 신부는 또한 부모가 수도회 신부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아 퇴교했다 입학을 하는 과정에서 동정서원을 두 번 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심지어는 부모가 자식을 결혼시키기 위해 별별 수단을 다 했다는 얘기도 신 수녀님이 해 주었다. 그러나 선종완 신부는 이에 굴하지 않고 신부가 되어 구약성서 번역이라는 대업과 성모영보수도원 창설이라는 위대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선 신부는 키가 작고 몸도 튼튼하지 않았지만, 지향하는 바가 높고 커서 하느님의 말씀(Logos)을 문자로 이 세상에 남겼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현재 그의 유해는 성모영보수녀원에 묻혀 있다. 그리고 그가 남긴 유물과 유품은 고향 마을이 바라다 보이는 용소막 성당에 있다. 선종완 신부 유물관이 너무나 외진 시골에 있어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용소막 성당은 생각보다 큰 성당이다. 신도수도 많고 활동영역도 넓기 때문이다. 만약 선종완 신부 이야기가 알려진다면, 용소막 성당을 찾는 사람은 더 늘어날 것이다.
#선종완 사제 유물관 #용소막 성당 #성서 번역 #성모영보수도원 #청빈과 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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