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물쇠로 물고기 형태가 많다. 잘 때도 눈 뜨고 자는 물고기 습성처럼 재물을 지켜달라는 뜻이 있단다. 알 많이 낳는 물고기처럼 자손을 많이 번성시키고 재물도 늘려달라는 염원도 있다.
김종신
문자와 동식물 모양으로 가구를 꾸민다. 무병장수와 다산을 기원하는 수복강녕(壽福康寧), 부귀다남(富貴多男), 백복자래(百福自來)와 같은 글자가 주를 이룬다. 오래 살기를 염원하는 까닭에 학·사슴·거북이과 같은 십장생이 많다. 십장생은 아니지만 물고기 장식도 많다.
또한, 자물쇠로 물고기 형태가 많다. 잘 때도 눈 뜨고 자는 물고기 습성처럼 재물을 지켜달라는 뜻이 있단다. 알 많이 낳는 물고기처럼 자손을 많이 번성시키고 재물도 늘려달라는 염원도 있다.
"나 여기 고전의 숲에 왔네. / 조선의 은밀한 빗장을 열고/ 이 무기교의 기교/ 은근한 곡선의 찬란한 청동의 녹속에 / 얼비춰흐르는 선조의 맥박이여/"예전에 태정민속박물관을 찾은 정목일 수필가처럼 조선의 은밀한 빗장을 열고 선조의 맥박을 느꼈다. 또한, 한 사내의 고집스런 집념의 결과물을 열정이라는 단어로 느꼈다.
선생은 어려서 함양을 떠나 진주로 왔다고 한다. 밤에는 야학교를 다녔고 낮에는 아이스케키(아이스크림)며 찹쌀떡를 팔았다 한다. 13살 때 진주제3야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10리 배달요금으로 10전(당시 비빔밥 한 그릇 정도의 값)을 받는 '별사배달원'을 하기도 했다. 일제 때 징용으로 일본 시모노세키에 도착한 뒤 탈출했다. 일본에서 아는 사람의 도움으로 고철을 운반하는 중노동을 하다 해방을 맞아 한국으로 돌아왔다.
진주시내에 양화점을 연 선생이 장석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53년. 한국전쟁 와중에 세간을 다 불태우고 장롱 하나 장만할까 하던 중에 엿장수의 지게 위에 놓인 경첩을 발견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엿장수 지게에 있던 장석을 보는 순간 너무 아름다워 한 벌을 200원에 샀다. 그러나 사들인 장석 한 벌이 농 한짝에 붙이기에 모자라는 것임을 알고 모자라는 다른 한 벌을 채우기 위해 장석 수집에 나섰다. 하나둘 모으기 시작한 것이 20만점이 넘게 됐다고 한다.
▲진주향토민속관 제1전시실
김종신
박물관의 주인공은 장석이지만 전시된 쇠붙이 장석에 생명을 불어넣은 이는 고(故) 태정(苔井) 김창문(金昌文)선생이다. 1923년 경남 함양군 안의면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선생은 구두수선공으로 번 돈으로 평생에 걸쳐 수집한 옛 가구 장석류와 자물쇠 등 9 만여 점을 경남 진주시에 기증해 현재에 이른다. 선생이 아니었으면 그저 고물로 버려질 문화재였다.
"저는 죽어서도 천당갈 것입니다. 이 장석이나 생활도구들은 조선시대에도 가장 천대 받던 장인들이 만들었고 그래서 그들의 한과 억울함이 배어 있는 물건들이지요. 이런 유물들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으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 구경까지 시키고 있으니 이들이 저에게 많은 복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선생의 살아생전 말씀처럼 아마도 천당에서도 장석을 수집하고 계실지 궁금하다. 바가지는 없다. 다만, 한 사내의 열정을 고스란히 구경했다.
故 태정(苔井) 김창문(金昌文)선생(1923~2003) 약력 |
△1923년 경남 함양 안의면 출생. △진주 제3야학교 졸업. △진주 한빛공민학원 설립 참여와 원장 역임, △1956년부터 조선 가구장석 본격 수집. △1969년 한국 다례회 회장. △1982년 진주 '조선시대 가구장석박물관' 개관. △1982년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 수상(제1호). △1985년 태정민속박물관 신축 개관. △1986년 경상남도문화상 수상. △1999년 수집 민속자료 진주시 기증 후 진주향토박물관 개관. △ 2003년 노환으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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