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큰 집을 유지하는 게 쉽지 않겠구나

[낙동강을 따라가는 퇴계와 농암의 흔적 ⑤] 분강서원과 애일당

등록 2014.02.17 11:13수정 2014.02.17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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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강서원이라는 이름에서 서원의 역사를 알 수 있다

a  분강서원

분강서원 ⓒ 이상기


퇴계종택을 나온 우리는 서쪽의 분강서원으로 간다. 분강서원기(汾江書院記)에 따르면 분강서원이 세워진 것은 1702년이다. 그 전까지는 농암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향현사로 존재하고 있었다. 향현사가 처음 생긴 것은 1612년이다. 그 후 1699년 영정을 봉안하는 서원을 세우자는 의견이 형성되었고, 2년여가 지난 1702년 묘우(廟宇)와 강당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해 10월 후손과 유림들이 참석한 가운데 영정을 봉안하고 향사를 거행하게 되었다.


분강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7년 옛터에 복원되었다. 그러나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이 지역이 수몰되어, 1975년 서원이 도산면 운곡리의 도곡재사(道谷齋舍) 옛터로 이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2006년 농암유적지 정비사업을 통해 현재 위치인 가송리로 이전 복원하게 되었다.

a  향현사

향현사 ⓒ 이상기


분강서원은 정문인 유도문(由道門), 강학공간인 전교당(典敎堂), 제사공간인 향현사(享賢祠), 숙박공간인 동서재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가장 오래된 향현사 사당이 경북 도유형문화재 제31호다. 이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이곳에는 원래 농암 선생의 영정이 있었으나, 현재 보안을 이유로 한국국학진흥원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영정은 문화재로서 그 예술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 제872호가 되었다. 비단에 채색한 이형 초상화로 가로 105㎝, 세로 126㎝다. 이 초상화는 농암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던 1537년(중종 32년) 동화사의 승려이자 화가인 옥준이 그렸다고 전해진다. 관모가 아닌 패랭이를 쓰고 붉은색이 감도는 옷을 입은 자유분방한 모습이다. 그림에서 농암은 양손을 드러내고 경상(經床)에 앉아 일을 처리하고 있다.

농암신도비를 통해 살펴본 농암 이현보의 삶

a  농암신도비

농암신도비 ⓒ 이상기


분강서원을 나오면 오른쪽으로 농암신도비각이 보인다. 그 안에는 홍섬이 찬한 농암선생 신도비가 있다. 비석 윗부분에는 전서로 '지중추부사 증시 효절이공신도비명'이라고 썼다. 신도비문을 통해 우리는 농암의 외모와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공이 나서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골상이 비범하며 뜻이 호탕하여 구애됨이 없고 자못 활 쏘고 사냥하기를 좋아하여 학문에는 전력하지 아니 하였다. 향교에 유학할 때부터 비로소 발분(發憤)하여 글을 읽고 문장을 짓게 되니 글을 짓는데 뛰어나서 여러 무리 가운데 중하게 되었다. 문광공(文匡公) 홍귀달(洪貴達)에게 수업하니 문광이 그의 기국(器局)을 중히 여겼다."

22세 되던 해 안동권씨와 결혼했고, 25세 되던 해에는 용산 지장암에서 퇴계의 숙부인 이우와 함께 공부하기도 했다. 28세 되던 1494년에는 향시에 장원을 했고, 이듬해 생원시에 합격했다. 성균관 생원을 거쳐 32세 되던 1498년 문과 병과에 합격해 벼슬길에 올랐다. 1504년 사간원 정언이 되었고, 1507년 호조좌랑을 거쳐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a  농암 초상화

농암 초상화 ⓒ 이상기


1508년에는 부모봉양을 위해 영천군수로 나왔고, 밀양부사를 거쳐 1516년 충주목사가 되었다. 효자였던 농암은 1517년 부모봉양을 위해 다시 안동부사로 내려간다. 그는 경직을 맡는 틈틈이 외직을 자원해 고향에 가까운 성주목사, 대구부사 등을 역임한다. 1530년 65세에 모친상을 당하고, 1536년 4월에 부친상을 당한다. 그리고 5월 부인상을 당한다.

73세가 되는 1538년에 농암은 형조참판이 되고, 그 후 호조참판과 동지중추부사가 된다. 그리고 1542년 가을 한양을 떠나 완전히 고향으로 돌아온다. 이 후 그는 지산정사(芝山精舍)를 짓고 이황 등 후배 문인들과 어울리며 안빈낙도의 삶을 살아간다. 때때로 애일당(愛日堂)에서 가까운 임강사(臨江寺)에 가기도 하면서 노년을 즐겼다. 농암의 세 아들도 모두 관직에 나가 지방 수령을 역임했다.      

애일당과 강각은 어떤 곳인가?

a  애일당

애일당 ⓒ 이상기


신도비를 살펴본 나는 이제 마지막 공간 애일당과 강각(江閣)으로 간다. 이 두 건물은 이름에 걸맞게 애일당은 산쪽으로, 강각은 강쪽으로 위치하고 있다. 애일당은 농암이 46세 되던 1512년, 나이든 부친과 노인들이 함께 지낼 수 있는 경로당 개념으로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노부모의 늙어감을 아쉬워하며, 하루하루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뜻으로 애일(愛日)이라는 당호를 사용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건물로, 앞쪽 4칸은 대청 뒤쪽 4칸은 방의 개념으로 만들었다. 뒤쪽 방 중 양쪽 두 방은 온돌을 들여 따뜻하게 했고, 가운데 두 방은 마루방 형태다. 대청은 난간을 만들어 안전을 도모했다. 가구는 5량가이며, 팔작지붕에 겹처마다. 애일당은 1548년에 중창되었으며, 농암은 그 때의 심경을 '애일당 중신기(重新記)'로 남겼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후기에 지은 것이다.

a  한국국학진흥원에 있는 애일당 현판 원본

한국국학진흥원에 있는 애일당 현판 원본 ⓒ 이상기


건물 안에는 '애일당 중신기', '농암 애일당 원운(原韻)'과 모재 김안국, 퇴계 이황, 학봉 김성일의 차운시가 걸려 있다. 애일당 중신기에 따르면, 세월이 흘러 당우가 기울고 퇴락해서 증수하고 더한다. 바위 위에 집을 지어 마치 층탑같이 높다. 소나무 그늘이 드리운 길을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야 하므로, 숨을 몰아쉰 후에야 오를 수 있다. 그리고 애일당에 올라 바라보는 경치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a  강각에서 바라 본 낙동강

강각에서 바라 본 낙동강 ⓒ 이상기


"북쪽을 바라보니 높은 산이 구름을 떠받치고 있다. 서쪽으로는 수풀이 길을 따라 울창하다. 동쪽으로는 큰 강이 굽이쳐 흘러간다. 청량산에서 내려오면서 천개의 바위와 만개의 골짜기를 따라 돌고 돈다. 물이 돌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곳에는 독살(魚箭)을 설치하고, 흐름이 길게 이어지는 곳에는 물살이 빨라져 깊은 못(潭)을 형성한다."

그리고 '농암 애일당' 시에서는 농암과 애일당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설명에 의하면, 농암은 집 동쪽 강가에 있다. 높이가 한 장(丈)이 넘고 그 위에 20여 명이 앉을 수 있다. 강쪽 여울이 급해 울림이 크다. 물소리가 요란해 귀가 먹먹하고 말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다. 그래서 귀먹바위가 되었다. 시에 의하면, 애일당은 부모를 위해 사람이 많이 모이는 집(滿堂), 경사스런 집(慶堂)이다.

a  강각

강각 ⓒ 이상기


애일당 앞에 있는 강각도 1512년 경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애일당에 비해 강가에 지어져 풍류를 즐기는 누각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의 풍류가 나중에 '어부가'로 표출되었다. 강각을 찾은 시인묵객은 수도 없이 많다 그 중 퇴계의 방문을 받고 기뻐하는 농암의 시가 지금도 전해진다. 퇴계가 이곳을 방문한 때는 한겨울(仲冬)이었다.

강각은 외로이 잠들어 있고 발은 반쯤 열려있는데   江閣孤眠簾半開
발자욱 소리가 홀연히 들려 바라보니 퇴계가 와.     跫音忽報退溪來
연말 해가 짧은 것을 오히려 아쉬워하면서             臘前晷刻猶嫌短
돌아가는 가마를 서둘러 바위 옆에 기대놓는다.      返駕匆匆傍石隈   

농암각자도 있네 그려
 
a  농암각자

농암각자 ⓒ 이상기


    
농암각자(聾巖刻字)의 연원은 예안-도산 간 지방도로가 개설되는 일제강점기로 올라간다. 당시 분천동(汾川洞)에 위치하던 농암 애일당(愛日堂) 옆으로 도로가 나, 애일당을 인근 영지산 위로 옮길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마을에서는 옛 자리를 기념해 강변 바위에 '농암선생정대구장(壟巖先生亭臺舊庄)'이라는 여덟 글자를 새기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농암각자다.

농암각자는 전면을 다듬은 네 개의 큰 바위 면에 농암선생정대구장이라는 여덟 글자를 두 자씩 새겨져 있다. 그러므로 농암, 선생, 정대, 구장이 한 쌍이 된다. 정대는 정자와 누대의 준말이고, 구장은 옛터라는 뜻이다. 글자하나의 크기는 대략 75㎝ 정도로 비교적 큰 편이다. 그 중 농암 두 자를 새긴 바위가 가장 커 길이가 5m나 된다. 나머지는 길이가 4m다.

농암각자는 안동댐 건설로 물속에 잠기게 되었는데, 1975년 이를 막기 위해 바위에서 글자만 떼어내 분천리 산11-17번지 마을 뒷산으로 옮겼다. 그 후 2006년 농암유적지 정비사업을 통해 도산면 가송리 현 위치로 다시 옮겨지게 되었다. 농암각자는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1973년 8월 경북 유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되었다.

a  분강서원 영역

분강서원 영역 ⓒ 이상기


농암각자를 떠나며 나는 낙동강의 한속담(寒粟潭)과 벽력암(霹靂巖)을 바라본다. 한속담은 물이 차가워 소름이 끼칠 정도의 못이라는 뜻이고, 벽력암은 벼락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는 바위라는 뜻이다. 이곳에서 물이 휘돌아 흐르며 깊은 소를 형성하고, 바위와 부딪쳐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강을 따라 나는 종택 쪽으로 올라간다.

그러고 보니 농암 종택의 영역이 굉장히 넓다. 이렇게 크고 넓은 집을 유지하려면 그 운영비가 만만치 않겠다. 사실 한옥이 관리비, 난방비 등 유지비가 많이 드는 편이다. 정부의 지원이 없으면 현상 유지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고택 체험, 그게 종택 운영에 크게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 현재 모든 종택, 서원, 재실, 사당 등이 직면해 있는 공통의 어려움이다. 도대체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고 해결해야 할까?
#분강서원 #애일당 #강각 #농암신도비 #농암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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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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