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이냐 카드냐 그것이 문제로다
최유진
2004년 집에 불이 난 뒤 생활이 많이 달라졌다. 가장 큰 변화는 경제 사정이 극도로 나빠졌다는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화재 직후, 1992년부터 운영해온 가게가 하루가 다르게 힘들어졌기 때문이었다. 이웃집의 부주의로 불이 나 집이 모두 탔지만, 보상은 전혀 받지 못했다. 당시 아이들은 초등학교 6학년과 3학년이었다. 먹을 것부터 입을 것까지 정말 많은 것들이 필요한 나이였다.
가게는 갈수록 눈에 띄게 매출이 떨어지는데 돈 쓸 일은 많고…. 급한 사정에 의지할 것은 신용카드뿐이었다. 화재 당시 내겐 네 장의 카드가 있었다. 한도가 1200만 원인 카드를 비롯해 나머지 카드의 한도도 수백만 원씩이라 결제 날짜만 잘 이용하면 큰 어려움 없이 결제대금을 낼 수 있었다. 이렇다보니 신용카드의 위험이 피부에 전혀 와닿지 않았다. 그리하여 화재 이후 신용카드를 더욱 더 요긴하게 쓰곤 했다.
우린 자동차용품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사업자등록 상태라 신용카드 사용자인 동시에 가맹점이었다. 우리가 취급하는 물건은 몇 천 원짜리부터 100만 원이 넘는 물건까지 있었다. 가게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가맹점 수수료가 나가지 않는 현금 손님을 반가워하면서도, 소비자로서 난 쉽게, 그리고 생각 없이, 적은 금액도 신용카드로 결제할 정도로 신용카드 애용자였다.
가게 손님들 중 몇 십만 원 하는 물건도 꼭 현금으로 사는 손님들이 있었다. 가끔은 금방이라도 구매를 하거나 작업을 맡길 것처럼 물건 값에 작업과정, 비용까지 물어놓고 며칠 후 현금을 가지고 오겠다며 가는 손님들도 있었다. 물론 그들 중 대부분은 며칠 후 현금 뭉치를 들고 왔다.
가맹점 수수료를 내지 않아도 되니 그런 손님들이 고마웠다. 그러나 한편으론 신용카드를 이용해 할부로 내는 게 현명할 것 같은데, 나라면 그럴 것인데 현금을 고집하는 것이 이해가 안 됐다. 며칠 뒤에 오겠다고 해놓고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지만, 뭐랄까, 시대감각이 떨어져 보였다고 할까. 난 그정도로 신용카드의 혜택을 고마워하며 즐겨 썼다.
사실 내 형편에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옷이나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가끔 사기도 했다. 그런데 대부분은 장을 보거나 아이들 옷가지를 사는 등 꼭 필요한 지출이었다. 때문에 결제 금액이 눈에 띄게 늘고 있음에도 큰 자책 없이 신용카드를 사용했다. 정말이지 기댈 것은 신용카드뿐. 장사가 잘되면 결제대금을 줄일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크게 걱정하지 않고 쓰고, 또 썼다.
현금 내는 손님들, '시대감각 떨어진다' 생각했는데...그 결과, 화재가 난 뒤 1년 반쯤 지난 2005년 가을에 갚아야 할 신용카드 대금은 1500만 원을 훌쩍 넘기고 말았다. 불과 두 달 전까지 결제가 힘들단 생각을 하지 않을 정도였는데 말이다. 눈덩이처럼 불어만 가는 카드결제대금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자거나 악몽을 꾸는 날이 많아졌다. 어떻게든 줄여보려고 했으나 속수무책. 필요한 돈 앞에 어쩔 수 없이 또 신용카드를 쓰는 상황이 되풀이될 뿐이었다.
그러나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을 둘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든 줄여보자'란 생각으로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 외엔 지출하지 않았고, 현금서비스도 최대한 자제했다. 그러나 줄기는커녕 계속 늘기만 했다. 와중에 가게를 하면 할수록 적자만 커진다는 결론을 냈고, 우린 가게를 접기로 했다.
가게를 접자 마음먹으니 가장 먼저, 가장 크게 걱정되는 것이 카드대금이었다. 사실 그때까지 며칠 동안의 매출액으로 카드대금을 메꾸곤 했다. 그런데 가게를 접으면 더 이상 카드값을 막을 수 없었다. 어떻게든 해결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우리가 가진 것 중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정리했다.
아이들이 태어난 직후 만들어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차곡차곡 붓던, 몇 년 동안 아이들이 받은 세뱃돈을 고스란히 모은 주택통장 두 개를 해약했다. 30개가 넘는 아이들 돌반지도 처분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손 벌리고 싶지 않았던 형제들 도움도 받았다. 친구에게 빌리기도 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끼고 있던 반지까지 모두 팔고 말았다. 자그맣게 들고 있던 적금도, 보험도 모두 해약했다.
카드대금 때문에 소중한 것들을 많이 잃었다. 적은 액수로 시작되어 한번 굴릴 때마다 눈덩이처럼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난 카드대금 때문에 잃어버린 것들이었다. 이처럼 많은 것들을 잃고 정리했음에도 한도가 가장 적은 S카드의 결제대금은 메우지 못한 상황에 카드들을 죄다 잘라버렸다. 자르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카드를 다시 쓸 수밖에 없을 정도로 돈이 매우 궁한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들 세뱃돈 통장도 해약... 소중한 것들을 많이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