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에 개관한 여성노인 공동체 '바바야가의 집' 건물 전경.
목수정
그러나 고작 월 1000유로(약 150만 원)의 연금을 받는 일흔이 다 된 노인이 무슨 수로 세상에 존재하지도, 아무도 생각해본 적 없는 노인들의 공동체를 만들어낸단 말인가? 미국에서였다면 당연히 부자들을 찾아 기부를 호소했을 테지만, 프랑스에서는 이럴 때 당연히 공공기관의 문을 두드린다. 하룻밤에 써내려간 바바야가의 집 프로젝트는 5년간 그녀의 책상서랍 속에 처박혀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와 같은 고민, 같은 어려움에 봉착했던 페미니스트 동지들을 만나 수다를 떨다가 결국 바바야가의 집 설립이 필요하다는 데 세 사람 모두 동의하게 된다. 그것이 2000년이었다. 머리를 맴돌던 일이 비로소 벌어지는 순간은 바로 뜻있는 동지를 만나는 순간이 아니던가. 셋은 바로 협회를 결성했고, 그때부터 회원을 모으고, 온갖 관공서를 찾아다니며 이 신념을 역설했다. 그러나 그 어떤 관공서도 이 무시무시한 혁명을, 더구나 여자들끼리만 모여서 벌이겠다는 모의를 선뜻 팔 벌려 받아주지 않았다.
그러다 결정적 순간이 다가왔다. 2003년의 폭염, 말 그대로 살인적이었던 더위로 무려 1만 7000명의 프랑스 노인들이 집에서 죽어갔다. 정부 관계자들은 모두 휴가를 떠나고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허둥대며 할 말을 찾던 그때, 테레즈는 처음으로 그들이 준비해온 '바바야가 프로젝트'라는 대안을 회심의 카드처럼 언론에 내놓았다.
인구학에 대한 박식한 과학적 통계를 제시하며, 늘어나는 노년층을 지금 이대로 방치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직무 유기를 지적했다. 그 내용이 신선하고 개혁적이어서 누구나 입을 벌렸다. 르몽드가 그녀들의 프로젝트를 대서특필했다. 그 후 셀 수 없이 많은 언론들이 바바야가 프로젝트를 대안으로 입 모아 말하기 시작했다.
공기관도 더 이상은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이윽고 테레즈가 40년째 살고 있는 파리 외곽 도시 몽트뢰유의 시장이 부지를 마련해 주었다. 건설비용 중 200만 유로는 30년 장기 상환으로 빌렸으며, 나머지 200만 유로는 도의회와 주택부가 대부분 마련해 주었다. 또 주택부 장관의 전폭적 지원으로 새로운 형태의 노인 공공주택에 대한 법적 지위도 신설할 수 있었다. 그러나 종이 한 장에 담겼던 공동체 공간에 대한 청사진이 25개의 독립된 주거공간이 함께 모여 있는 건물로 실현되기까지는 1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1968년, 샤넬 정장을 내던지고 거리로 1927년, 테레즈 클레르는 파리의 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전형적인 가톨릭 부르주아 집안이었다. 다소 특별한 점이 있었다면 각별했던 부모님의 사이였다. 부모님의 침실에서는 언제나 큰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잠시 조용해지다가 행복한 얼굴로 함께 나오셔서 즐거움이 맴도는 식탁에 마주앉곤 했다. 테레즈는 50년간 해로하시며 하루도 빠짐없이 사랑을 나누신 두 분이 자신의 오늘을 있게 한 가장 큰 자산이라고 말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테레즈는 모범생이 아니었다. 학교 공부에 전혀 관심도 재능도 보이지 않았지만 언제나 인기만은 최고였다. 엄마는 외모가 예뻤던 딸을 일찌감치 좋은 신랑에게 시집 보낼 궁리를 했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누린 엄마에게 결혼이야말로 딸의 행복을 보장하는 가장 안전한 선택이었다. 부르주아 남편을 만나 결혼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스무 살. 기업가의 아내이자 네 아이의 엄마 노릇을 완벽하게 해내던 그녀는, 그러나 자신의 삶에 큰 허점이 있다는 사실에 점점 눈을 떠갔다.
일탈의 벌레가 사과 속을 뚫고 들어갔던 것은 교회에서였다. 그녀가 다니던 교회에는 목사이자 동시에 노동자인 마르크스주의자 성직자들이 있었다. 그들을 통해서 그녀는 마르크스를 배웠고 억압, 착취, 계급 등 마르크스가 세상을 분석하는 기본적 도구를 습득했다. 마르크스의 이론을 듣고 있노라면, 그녀는 그것이 바로 자신의 삶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 아이를 낳아 기르고, 집안 살림과 식사를 준비하며, 밤에는 남편과 원하건 원하지 않건 섹스를 한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 어떤 보상도 사회적 인정도 없으며, 남편은 그녀가 살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로 취급한다.
목사들 앞에서 그녀는 때때로 고개를 쳐들었다. 그럴 때면 그토록 착취당하는 노동자의 삶을 안타까워하던 목사들이, 여자들은 경우가 다르다며 말을 돌렸다.
"당신들은 가정을 지키는 수호신들입니다." 그녀는 교회도 마르크스도 말하지 않은, 또 다른 계급투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것은 가부장사회였고, 그 사회에서 남자는 자본가였으며 여자는 프롤레타리아 중에서도 최하층민이었다.
1965년, 그녀는 우연히 신문에서 '이제부터는' 결혼한 여자도 남편의 '허락 없이' 자신의 통장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달음에 자신의 이름으로 통장을 만들고, 가족수당 지급 기관에 편지를 썼다. '가정에서 자녀들을 위한 비용을 지출하는 주체는 나이므로, 이제부터는 내 통장에 수당을 보내달라.' 기적처럼 그 요구는 즉각 실현되어 그녀의 통장에 가족수당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 사실을 안 남편은 노발대발했고, 둘 사이에는 점점 더 큰 긴장과 갈등이 차올라왔다.
68혁명의 광풍이 모든 구시대의 악습을 거부하고 깨부수며 반란의 정신들을 거리로 불러냈을 때, 그녀는 순식간에 그 물결에 합류했다. 낮에는 거리로, 대학으로, 토론과 집회 사이를 쏘다니고, 아이들이 학교를 마칠 시간이면 황급히 돌아와 과거의 전형적인 주부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이데올로기적 외도, 돌이킬 수 없는 일탈이 시작되었다.
자신과 같이 육체와 영혼이 온전히 사로잡혀 있던 여성들을 만났고 지금까지 살았던 곳이 감옥임을 깨달았다. 68혁명의 열기가 잦아들 무렵, 그녀는 몸져누워 병원에 몇 달간 입원했다. 그곳에서 자신이 얼마나 사회성이 발달한 인간인지를 발견했다. 그녀의 입원실은 병원의 모든 여자들이 모여드는 만남의 광장, 모든 일상의 주제들이 논의되는 아고라가 되어갔다. 그녀는 이제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알았다.
1969년 퇴원을 하면서 그녀는 이혼을 택했다. 청소년이 된 네 아이를 데리고. 자유를 품에 안았지만 가난이 엄습해왔다. 그러다 누군가의 대타로 갔던 쁘렝땅 백화점 장난감 코너에서 그녀는 판매원으로서의 폭발적인 재능(!)을 발견한다. 모든 아이와 엄마들이 그녀 앞에서 홀린 듯 장난감을 사갔다.
그녀는 판매원으로 나선 첫날, 자신이 평생 굶어 죽지 않을 재능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샤넬 정장, 하이힐, 과거 부르주아 가정의 귀부인을 상징하던 모든 물건들은 내다팔고 대신 바지와 플랫 구두로 갈아 신었다. 그리고 완전히 다른 삶이 그녀 앞에 펼쳐졌다.
당신의 몸은 오로지 당신의 소유물이다 68혁명은 단지 1968년 단 몇 개월 동안 거리에서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었다. 그때 거리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이후 10여 년간 68혁명의 시절을 연장해가며 68혁명을 일상에 녹여내는 작업을 진행해갔다. 테레즈는 즉각 급진적인 페미니즘 그룹에 합류했다. 그들은 생식의 도구로 철저히 이용되는 여성의 몸이 오로지 그 자신의 것임을 선언하는 작업으로 운동 차원에서 '무료 낙태시술'을 택한다. 슬로건은 '아이? 우리가 원하면, 그리고 우리가 원할 때!'였다. 뜻을 같이 하는 의사들이 몇몇 활동가들에게 낙태시술법을 전수했고, 그녀의 집에서 낙태시술을 시행했다.
68혁명을 즈음하여 페미니스트 그룹에서 만났던 여성들은 서로 금기시해 오던 영역인 '몸'과 '성'을 둘러싼 모든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거기서 모든 가임 여성들이 공유해온 가장 오래된 공포는 다가오지 않는 생리 날짜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피임약은 널리 보급되지 않았고, 여자들은 임신의 기쁨을 누리기보다 더 많은 시간을 '임신의 공포'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는 사실을 왜 아무도 말하지도, 활자화하지도 않았던가? 원하지 않는 아이를 임신했을 때 낙태를 해야 하지만 여전히 불법이었으니, 그녀들은 엄청난 비용과 건강상의 위협이라는 두 가지 장애를 극복해야만 했다.
세상의 여자들이 가장 많이 죽었던 순간은 출산 혹은 낙태 시술 때였다. 이 오랫동안 강요된 비밀을 모두가 공유하는 것은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밤이고 아침이고, 많은 여자들이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그녀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그러면 같은 건물에 모여 살던 동지들은 각자 역할을 나누어, 또 한 명의 여자가 두려움과 공포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돕는 작업에 착수했다.
다행스럽게도 테레즈가 했던 그 어떤 시술에서도 뜻하지 않은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리고, 연대의 정신으로 똘똘 뭉쳐 있던 당시 이웃들 중에 누구도 여전히 불법이던 낙태시술이 집에서 행해지는 사실에 대해 밀고하지 않았다. 1975년, 프랑스에서 낙태를 합법화하는 '베유 법'이 통과되자 페미니스트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때부터 프랑스 여자들은 의료보험상의 모든 혜택을 누리며 안전한 환경에서 원하지 않는 임신을 거부할 권리를 획득했다.
테레즈와 그녀의 페미니스트 동지들이 당시 가장 열렬히 탐독했던 사상은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 1897~1957년)의 그것이었다. 그는 68혁명의 가장 뜨거운 이데올로그였고, 가장 핵심적으로 68혁명을 지배한 사상가였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접목하면서 양 진영으로부터 버림받았던 지난 시대의 모독된 다이너마이트는 68혁명에 와서 진정으로 부활했다.
그는 성과 정치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그 천기를 누설한 죄목을 뒤집어쓰고 좀처럼 주류 세계에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성적 억압에 익숙한 대중은 독재를 원한다는 충격적 논리는 68세대들의 뇌관을 직통으로 건드린다. 여전히 테레즈는 이제 막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대한 정치적·사회적 세포를 키우기 시작한 젊은이들에게 빌헬름 라이히의 책을 입문서처럼 권한다.
성과 몸에 대한 담론은 68혁명에 와서야 한여름 밤에 대지를 적시는 소나기처럼 온 세상을 흥건하게 적셨다. 비로소 우리는 몸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고, 비로소 그 몸의 금기로부터 벗어나 작렬하는 환희를 맞이할 수 있었다. 자신의 몸이, 어느 한 남자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이 소유한 것이라는 이 단순명료한 사실을 여자들은 혁명을 거치며 비로소 깨달았다.
"몸이야말로 가장 핵심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를 구현하는 삶의 핵심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몸은 억압 당했고, 몸에 대한 사고와 말은 금지 당했다." 그녀의 동료, 친구들은 이러한 라이히의 주장을 통해 정치와 성을 밀접히 연결 짓는 사고를 철저히 구축한다.
당시 대부분의 페미니스트들이 그러했든 테레즈도 동성애를 경험했다. 동성애를 경험하는 것, 이 또한 그들에게는 확고한 정치적 행위였다. 그것은 여성의 몸에 대한 남성의 배타적인 지배를 거부하는 동시에 여성의 몸이 갖고 있는 모든 쾌락의 가능성을 완전히 열어젖히는 해방의 행위였다. 테레즈는 수많은 여성, 남성들과 함께 몸이 주는 기쁨을 아낌없이 누리며, 태양 같은 에너지를 축적하고, 가는 곳곳마다 폭풍 같은 에너지를 전하는 활동가의 삶을 멈추지 않았다.
정성어린 음식을 만들며 식탁에서 가족들이 둘러앉아 그것을 나누는 데서 큰 기쁨을 느끼던 그녀의 어머니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삶의 즐거움은 배로부터 온단다." 그러면 테레사는 한마디 덧붙였다.
"삶의 즐거움은 배 아래로부터 오지!" 어머니는 그런 테레사를 보며 눈을 찡그리면서도, 그녀의 말을 부인하지는 않으셨다!
질문의 노마드를 멈추지 마라"침실과 거리가 나의 유일한 대학이었다." 어쩌면 이 말은 테레즈를 이해하는 가장 핵심적인 문장일 것이다. 학교 제도에 오래 길들지 않은 그녀에게서는 언제나 경계 없는 상상력과 끝도 없는 새로운 프로젝트들이 솟아났고, 그것을 추진해내는 불같은 에너지가 있었다. 학교에서 거의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그녀였지만, 그녀와 얘기하고 있노라면 세상 그 누구 못지 않은 단단한 지성과 엄청난 문화적 소양을 지닌 사람임을 알게 된다.
"그것은 바로 활동가 생활이 내게 준 선물이지. 대학은 굳은 지식을 전하는 곳이야. 거기서 배운 지식이 사람들을 해방시키기보다 사람들을 그 지식 속에 가두는 경우가 더 많아. 하지만 운동가는 자신이 꾸는 꿈과 현실에서 마주하는 문제들로 인해 열심히 연구하고 공부하고 방법을 모색하게 되지. 토론하고 선언하고 실천해 나가면서 온전히 우리에게 피와 살이 되는 지식과 지혜들을 삶 속에서 얻고, 그것은 우리를 더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해방의 열쇠를 제공하지. (…) 그러니 질문하길 멈추지 말 것. 질문의 노마드(유목)로 계속 살아가는 것. 그것이 활동가의 첫 번째 사명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