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초등학교 수위는 '좌파'입니다

[목수정이 만난 파리의 생활좌파들⑨] 토마 페루아(Thomas Perroy)

등록 2014.05.09 18:37수정 2014.05.11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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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가장 행복한 나이, 73세


토마 페루아는 내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의 수위 아저씨다. 그는 파리에서 태어나 평생 초등학교 수위 일을 했다. 올해 65세. 다가오는 6월 말이면 정년퇴임을 한다. 많은 프랑스 사람들에게 은퇴는 가슴 설레는 단어다.

대부분 사람들이 한마디로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는 식으로 이 시기를 표현하고, 은퇴 후에는 무엇을 할지를 상상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자유의 시간을 준비한다. 프랑스 사람들 중에서 가장 행복지수가 높은 나이가 73세라는 통계를 본 적이 있다. 의무는 사라지고, 오로지 누리고 싶은 것을 누릴 수 있는 권리가 남아 있는 시기가 바로 그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직장에서의 생활이 딱히 괴로운가? 사실 아침에 지하철 안에서 출근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우리나라와 엇비슷하게 딱딱하게 굳은 얼굴들이 대부분이지만, 놀랍게도 프랑스 사람들이 직장에서 누리는 행복감이 73퍼센트라는 통계도 있다. 공기업의 간부들이 90퍼센트로 제일 높고, 그 다음은 농부(84퍼센트), 교사(79퍼센트) 순이다. 놀라운 점은 고된 직업군에 속하는 가사도우미(56퍼센트), 공장근로자(62퍼센트) 들이 갖는 만족도도 50퍼센트를 웃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토마가 자신의 직업을 좋아했고, 또 그의 은퇴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은 매우 보편적인 경우에 속한다. 이들에게 은퇴가 퇴출 명령이 아닌 것은 거의 대부분의 국민들이 은퇴 후에 국민연금을 타는 까닭에, 따로 노후 생활자금에 대한 복잡한 걱정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토마를 인터뷰하고자 했던 것은 이 설레는 자유의 시간을 앞둔 그에게 갑작스런 장애물이 생겨났고, 그가 그 장애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이 연속적으로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놀라운 시간을 살아가며 난생처음 주인공의 자리에 선 그의 모습을 지켜보며, 좌파의 또 다른 존재방식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좌파란 사회적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65세의 토마 페루아.
좌파란 사회적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65세의 토마 페루아. 목수정

은퇴 앞둔 그에게 몰아닥친 파고

토마 페루아는 파리 3구에서 태어나 단 한 번도 이 동네를 떠나지 않았고, 4구에 있는 초등학교 두 곳에서 평생을 수위로 일했다. 20년 넘게 그가 살고 있는 아파트가 얼마 전 새 주인에게 팔리고, 그 새 주인은 토마가 나가주기를 원하면서 그의 인생에는 예상치 못한 파고가 몰아닥쳤다.


마침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앞으로의 날들은 급여보다 적은 연금으로 살아가야 한다. 20년 동안 한 집에 살면서 그는 아주 낮은 월세를 내고 살았다. 프랑스는 매년 월세의 인상률을 아주 낮게 법으로 정해 놓고 있다.

그래서 한 집에서 오래 살면 그만큼 유리하다. 그러나 20년 전과 달리, 파리 한복판인 3구 혹은 4구의 아파트 월세는 학교 수위를 하다가 은퇴한 그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올라 버렸다. 이 동네에서 그가 구할 수 있는 아파트는 거의 없었다. 그에게는 두 가지 선택만이 있었다.

아주 멀리 파리 바깥으로 이사를 가든가, 아니면 임대아파트에 들어가는 것. 그는 물론 임대아파트에 들어가는 것만을 희망하고 있다. 어머니, 할머니 대부터 살아왔던 터전을 떠나야 한다면, 그는 차라리 거적을 두르고 거리에서 잠을 자는 노숙자가 되는 것을 택하겠다고 한다.

학교 학부모회에서 은퇴를 앞둔 그를 위한 환송파티를 준비하면서 상의를 하게 됐다. 어떤 선물을 원하느냐. 어떤 종류의 파티면 좋겠느냐 등의 물음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 앞에 닥친 암울한 미래가 파티를 상상할 수 있는 마음마저 삼켜 버렸기 때문이다.

그에게 닥친 어려움을 들은 학부모회장 아멜리 하그노(자기 자신도 이 학교를 다녔고, 그녀의 두 아이도 이 학교를 다닌다. 자신의 행복한 삶의 터가 이 학교에서 만들어졌다고 믿는 열성적인 활동가)는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등교시간, 토마를 위한 서명운동이 시작되었다.

이틀 만에 500명의 학부모들 가운데 450명이 이 서명에 동참했다. 그리고 일 주일 만에 33명의 학부모가 3구와 4구의 구청장에게 토마가 임대주택을 얻을 수 있기를 간청하는 청원서를 보낸다. 이 동네의 아이들을 위하여 토마가 일생 동안 바쳤던 노력이 당연히 보답 받아야 한다는 내용들이었다.

토마는 자신을 둘러싼 이 열정적인 학부모들의 행동에 고무되었다. 그날 이후 모든 사람이 토마를 보면 어찌되었냐고 경과를 물었다. 토마는 이 갑작스런 관심과 성원에 수줍어하면서도, 희망이 뿜어내는 흥분으로 얼굴에 분홍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 무렵, 아이들의 합창 발표가 있었다. 4구청 강당에서 벌어진 그날의 행사에 토마가 양복 차림으로 와서 앉아 있는 걸 보았다. 이게 마지막이라고 느꼈는지…. 그는 희열과 감격에 찬 눈물을 흘리며 아이들이 합창하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며칠 뒤 나는 그에게 만나기를 청했다.

 파리 마레 지구에 있는 초등학교 에꼴 세인트 메리 흐나흐(Ecole saint merri renard)의  내부. 토마가 20년간 근무했던 곳.
파리 마레 지구에 있는 초등학교 에꼴 세인트 메리 흐나흐(Ecole saint merri renard)의 내부. 토마가 20년간 근무했던 곳.Ecole saint merri renard

"나는 평생 좌파에 표를 던졌다"

목수정(이하 목) : 그래, 구청에서는 뭔가 희망적인 소식이 있나?
토마 : 일단 3구청장이 만나자고 해서 만났다. 두 번이나. 구청장이 학부모들의 열정적인 서명과 편지를 받아보고, 적잖이 영향을 받은 듯했다. 일단, 구청장이 나의 새 집주인에게 편지를 써서 6월 말까지 내가 집을 비워 주는 시간을 연기해줄 것을 부탁했고, 새 집주인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사이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구청장이 말했다.
목 : 그럼, 결국 아직 모르는 것 아닌가?
토마 : 그렇다. 사실은 아무런 결론도 나지 않았다. 시간만 좀 더 벌었을 뿐이다. 그래도 나는 학부모들의 응원에 많은 힘을 얻었다. 뜻밖이었고, 놀라운 성원이었다. 그래서 부활절 방학이 끝나고 나면, 난 다시 한 번 학부모들의 응원을 부탁할 생각이다.

목 : 꼭 그렇게 하길 바란다. 그런데 왜 당신은 꼭 이 동네에서 살기를 원하는가?
토마 : 3대째 이 동네에서 살아왔다. 나한테 여기는 세상의 중심이다. 지금 내가 이곳을 떠나야 한다면 쫓겨나는 느낌일 것이다. 그걸 받아들이기 힘들다. 학교 옆에 노숙하는 사람들 있지 않나. 나는 아침에 학교에 오면 종종 그들에게 커피 한 잔씩을 건네곤 한다. 그들과 얘기 나누다 보면 누구든지 이 골판지 밑으로 들어가 찬 이슬을 맞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 중에는 불과 10년 전까지 중소기업을 경영하던 사람도 있다. 어느 날 회사를 잃고, 그리고 집도, 가족도… 모든 것을 잃게 된 후 노숙자가 된 사람도 있다. 그들은 나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 아니다. 어느 날 사람이 벼랑 끝에 몰리고, 급기야 발을 헛디뎌 떨어지고 나면, 육체적·정신적으로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난 내가 그렇게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목 : 당신은 좌파인가?
토마 : 나는 평생 좌파에 표를 던졌다. 내 어머니, 내 할머니도 그랬다. 그런 면에서 난 좌파인 것 같다.
목 : 왜 당신은 좌파이기를 선택했나? 당신에게 좌파란 무엇인가?
토마 : 좌파는 부(富)를 나누고, 사람들 사이의 평등을 말하는 사람들 아닌가. 그리고 좌파는 사회적 약자, 자본을 갖고 태어나지 않은 자들의 편에 서고 사회적 정의를 실천하는 데 노력하는 사람들 아닌가. 난 그렇게 믿어왔다. 그래서 평생 좌파에 투표해 왔다. 3구청장이 이번에 재선되었는데, 난 그 사람이 아주 믿음직한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지난번 당선되었을 때부터 그에게 투표했다. 그가 처음 당선되었을 때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바로 그런 면에서 나는 이번에 많은 도전에 처해 있다.

나는 파리 시의 공무원으로, 공립학교에서 문지기 일을 하면서,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위해 내게 주어진 일 이상을 해왔다고 믿는다. 그리고 처음으로 난, 나의 조용하던 삶의 끝에서 사회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처했다. 나는 임대주택을 허락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나의 생각과 학부모들의 연대의 힘이 결국 배반 당한다면, 난 너무 화가 날 것 같다.

목 : 그렇지만 사실, 그 결과는 예측할 수 없는 것 아닌가?
토마 : 만약 부정적인 소식이 들려온다면, 나는 단식투쟁에 돌입할 것이다.
목 : 정말?
토마 : 물론이다.
목 : 그래도 원하는 바를 계속 얻지 못할 때는?
토마 : 그럼 단식하다가 죽을 것이다. 농담이 아니다. 교장에게도 언뜻 언질을 주었다. 교장이 농담하지 말라고 했지만, 난 단호하다. 나의 사회당에 대한, 좌파에 대한 평생의 믿음이 배반 당한다면, 살 수 없을 테니.

"은퇴 후 피아노 연주와 현대무용 배우고 싶어"

 파리 마레 지구에 있는 초등학교 에꼴 세인트 메리 흐나흐(Ecole saint merri renard)의 외관.
파리 마레 지구에 있는 초등학교 에꼴 세인트 메리 흐나흐(Ecole saint merri renard)의 외관. 목수정


목 :
혹시 자식은 없나.
토마 : 아들이 둘이나 있다. 그 중 큰 놈은 약간 괴물이다. 그놈은 세계적인 클래식 기타리스트다(그의 이름은 유디카엘 페화(Judicael Perroy). 과연 그의 이름을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니 위키피디아에 기타 신동이었던 과거와 오늘의 화려한 기타리스트의 삶이 기록되어 있다). 아홉 살 때 첫 연주회를 가졌고, 지금은 음악원 교수다. 일 년에 절반 이상은 해외 공연을 다닌다. 그 놈은 내 아들이 아닌 것 같다.

둘째는 스시센터에서 전화 주문을 받는 일을 한다. 그놈도 형처럼 똑똑했다. 그러나 언제나 반항기가 많았고, 그래서 반항만 하다가 10대를 다 보냈다. 지금은 형처럼 행복한 삶을 누리지 못한다. 하지만 난 두 놈을 똑같이 사랑으로 키웠다. 내가 원래 아이들을 좋아하기도 하거니와, 당연히 내 아이들이니까 극진하게 돌봤다. 그 아이들이 스무 살이 될 때까지는. 내가 이 직업을 택한 것도 그 이유에서다. 난 수위 일을 이른 아침부터 오후까지만 했다. 그리고 오후에는 늘 다른 사람이 내 배턴을 이어받았다. 많은 오후 시간을 내 아이들을 돌보는 데 썼다. 그리고 난 자유시간이 많이 필요한 사람이다. 매일 수영을 했고, 피아노를 쳤다.

목 : 피아노?
토마 : 큰 아들과 달리 나는 음악적 재능이 없어서, 난 정말 오랜 시간을 연습해야 제대로 한 곡을 연주할 수 있었다. 은퇴하면 나는 피아노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연주를 잘하고 싶다. 그리고 현대무용을 배울 생각이었다. 오래 전부터 은퇴 뒤에 현대 무용을 배우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 동네에 임대주택을 얻게 되는 경우에 이 모든 것을 실현하리라는 것으로 전제가 바뀌었다.
목 : 기타리스트 큰 아들은 여유 있는 삶을 살지 않나? 아들이 아빠를 도울 수 있는 것 아닌가?
토마 : 물론. 도대체 얼마나 버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많은 돈을 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기댈 생각은 조금도 없다. 내가 그 아이들을 키울 때, 나이 들어서 덕 보려고 키운 것은 아니니까. 내가 정말 힘들어지면 아이들이 나를 도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생각을 미리 염두에 두진 않는다. 나의 신념대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서 싸워볼 생각이다.

목 : 아들은 아버지가 처한 어려운 상황에 대해서 알고 있나?
토마 : 알고 있다. 그러나 잘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목 : 우리 아이를 데리고 이 학교에 왔을 때 처음 만났던 사람이 당신이다. 우린 당신의 친절하고 상세한 학교에 대한 설명을 듣고 당신이 이 학교 교장인 줄 알았다.
토마 : 기억난다. 여름방학 말미에 당신 가족이 학교를 찾아왔던 것.

목 : 그리고 아이가 학교에 다니면서 난 종종 우리가 교장한테 뭔가를 물어보면, 교장은 습관처럼 당신을 불러서 일을 해결하게 했다. 마치 당신이 교장의 오른팔처럼 보였다.
토마 : 우리는 20년 전, 같은 날 이 학교에 왔다. 우리는 서로 많이 의지했고 신뢰했다. 그래서 시간이 흐르면서 교장이 나에게 많은 일을 나눠주었다. 원래 수위가 할 일들이 아니었지만, 난 그를 돕는 게 즐거웠고, 내가 학교를 더 잘 돌아가게 하는 데 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날 더 보람 있게 만들었다(그 교장은 지난해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갔다). 그 교장은 동성애자결혼법이 통과되자마자 그의 오랜 친구와 결혼을 했다. 그때 난 이 학교 동료로서 유일하게 초대받은 사람이었다. 둘은 아주 행복해 보였다.

"수위로 일하며 아이 목숨 두번 살렸다"

목 : 얼마 전 한 교사가 일 주일간 결근했을 때, 당신이 결근한 선생님을 대신하는 소위 대타 선생님이 없다고, 정말 큰 문제라고 말하는 걸 들었다. 그럼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나?
토마 : 예전에는 교사가 결근을 하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만 전담하는 교사들이 넉넉히 있었다. 교사가 길게 결근을 하는 경우, 그런 교사들로 채워지곤 했다. 그런데 5~6년 정도 전부터는 그게 좀처럼 이뤄지지 않는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 교육의 질이 저하되고, 학부모가 더 이상 학교를 신뢰하지 않게 된다. 그게 지금 학교가 당면한 가장 큰 고민거리다. 물론 그것이 우리학교만의 문제는 아니긴 한다.  하지만 이 학교에는, 여전히 학교가 자랑하는 진주 같은 고학년 담당 교사들이 있다. 저학년 때 좀 부실하게 공부했던 아이들도 고학년 때는 모두 완벽하게 자신감을 회복하면서 이 학교를 떠나게 된다.

목 : 어떻게 그렇게 잘 아나?
토마 :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진 않지만 자주 교실에 올라가곤 한다. 늦게 오는 아이들을 교실에 데려다 주기도 하고, 학부모에게서 급한 연락이 오면 알려주기도 하고. 그때마다 교실 분위기를 본다. 6학년, 5학년 반에 가면 아이들의 눈과 귀가 모두 선생님을 향해 완벽하게 집중해 있고, 반짝이는 아이들의 눈이 선생님 앞에서 빛나는 것을 본다.

그걸 보면 그 아이들이 얼마나 지적인 열정으로 고양되어 있는지, 선생님과 한마음이 되어 배우는 것에 집중해 있는지 알게 된다. 교사들은 그 어떤 아이도 자포자기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든지 아이들이 자발적인 동기를 갖도록 해준다. 그런 경우를 한두 번 본 게 아니다. 그리고 이 학교의 아이들은 이 반에서 저 반으로 자유롭게 거닐면서 닫힌 세상이 아니라 열린 세상에서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만나는지를 배운다.

목 :  아, 벽이 없는 교실 구조를 말하는 것인가?
토마 : 그렇다. 벽이 없으니까 아이들은 오직 자기 반, 자기 학년의 아이들만 아는 게 아니라 다른 반, 다른 학년의 아이들과도 쉽게 친구가 되고, 가르침과 배움에 경계가 없다는 사실을 물리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 학교에 큰 도서관이 있지 않나. 열정적인 전문 사서도 있고. 그 사서도 오래 일한 사람이다. 그녀는 아이들의 관심사와 수준 등을 꿰고 있다. 열심히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독서지도를 해준다. 이 학교의 도서관은 아이들이 흔히 누릴 수 없는 보석이다.

목 : 아이가 종종 그 사서 선생님 이야기를 한다. 아이들이 책을 예약하기도 하고, 자기가 집에서 보았던 좋은 책을 추천하기도 하면서 사서 선생님과 아이들이 밀접하게 소통하고, 도서관이 매우 활기차게 돌아간다고 느꼈다.
토마 : 그렇다. 아이들한테 도서관은 샘물 같은 역할을 한다. 거기 모여서 물을 마시는 참새들처럼.

목 : 수위로 일한 동안 기억에 남는 특별한 일들이 있나?
토마 : 아이들의 목숨을 구한 일이 두 번 있었다. 놀이터에서 뛰어놀던 한 아이의 목이 놀이기구에 끼고 발은 들려 있었다. 무심코 그 뒤를 지나가다가 범상치 않은 상황인 것 같아 돌아가 보니, 아이는 목이 졸려서 죽어가고 있었다. 그 아이를 안아서 내려주었고, 그렇게 그 아이는 살아났다. 아이의 부모는 아이에게 그런 일이 있었던 것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난 그 녀석의 이름을 지금도 기억한다. 마치 내가 새 생명을 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녀석이기에….

순수한 좌파 수위 아저씨의 소박한 꿈 

 초등학교 에꼴 세인트 메리 흐나흐(Ecole saint merri renard)가 2010년 사르코지 정부의 교원 수 축소 시도와 관하여 벌인 거리 시위 때의 광경. 교장, 교사, 학생, 학부모가 모두 참여했다.
초등학교 에꼴 세인트 메리 흐나흐(Ecole saint merri renard)가 2010년 사르코지 정부의 교원 수 축소 시도와 관하여 벌인 거리 시위 때의 광경. 교장, 교사, 학생, 학부모가 모두 참여했다. 목수정

토마는 내가 아는 좌파들 가운데 가장 소박하고, 가장 순수한 좌파의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는 한치의 의심도 없이 좌파는 언제나 곤경에 처한 약한 자를 도울 거라는 믿음을 65세가 되기까지 간직하고 살아올 수 있었던 행운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믿음은 처음으로 도전에 처했다.

그는 단 한 번도 정당이나 노조에 가입해본 적이 없다. 그러니 조직이 주는 힘을 느끼거나 누려본 적도 없지만, 조직이 커지면 발생하는 환멸을 피할 수도 있었다. 관념적이고 이상주의적이라 부를 수 있을 법한 그의 사회주의는, 자신이 직면한 이 최초의 곤경을 사회적 투쟁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그 태도 속에서 유감없이 그 진가를 발휘한다.

한국에서 무려 12년 동안 학교를 다니면서 수위 아저씨와 이런 긴 대화를 나눠본 적도, 그들의 이름을 불러보거나 그들이 학교와 학생들에 대해 생각하는 바를 알 기회가 전혀 없었다. 토마를 통해, 수위 아저씨의 눈을 빌려 처음 학교를 바라볼 수 있었다.

학교의 문을 가장 먼저 열고, 지각한 아이의 아이의 손을 잡고 교실에 데려다주며, 교장과 교사 아이들 사이에서, 자신이 품은 온기로 빈틈을 묵묵히 메워주던 그. 이 소박한 사회주의자의 실천이 사회적인 보답을 받을 수 있다면, 프랑스 사회가 도달한 오늘에 대해 한 조각의 믿음을 보탤 수 있을 것 같다.  
#목수정 #파리 좌파 #국민연금 #은퇴 #노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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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글을 쓰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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