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적 병역 거부를 사유로 프랑스에서 난민 자격을 획득한 첫 한국인, 이예다.
목수정
그는 낯설었다. 다섯 번쯤 봤는데도 여전히 그랬다. 얼른 파악되지 않는 사람에게는 마음이 닫히기 쉬운 법이거늘 그에 대해서는 볼 때마다 한 움큼씩 조심스러운 호감이 일렁였다.
지난해 11월, 파리 부정선거 규탄 집회에서 그를 처음 보았을 때 그는 숲에서 방금 나온 그리스 신화의 남신 같았다. 스물넷의 청년이었지만, 열여덟 정도에서 나이가 멈춘 듯한 미소년이었고, 이 거친 세상에 발 딛고 우리와 함께 서 있지만, 어딘가 다른 세계에 속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길 없었다.
이예다. 1991년생. 2년 전 여름, 파리에 처음 왔고, 양심적 병역 거부를 사유로 프랑스에서 난민 자격을 획득한 첫 한국인이다.
유병언은 정치적 망명을 거절 당했다지만, 이예다의 양심과 군대를 강제하는 한국 정부의 상황은 그에게 난민 자격을 허락했다. 지난해 5월 난민 자격을 획득하고, 10년짜리 체류증을 얻은 지 1년 남짓. 지금 그는 베이글 전문 가게에서 일한다. 난민 신청자의 숙소를 나와 파리 근교의 한 아파트에서 산다. 불어도 어지간히 익숙해졌다. 그의 파리에서의 삶은 이제 막 뿌리를 뻗어가기 시작했다.
그가 프랑스 땅을 밟은 사유에 관심이 있는 만큼, 당에서 일하던 시절 어깨 너머로 배운 더듬이로 그를 관찰해 보았다. 그가 속했던 집단을 통해 사람을 분류하고 파악하는 그 못된 방법은, 직관이라곤 쥐뿔도 없는 수컷들이 만들어낸 어줍잖은 방식이었다.
당연히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예다는 특정 종교를 가진 것도, 성소수자도 아니며, 소위 학생 운동권에 몸담으며 선배들의 말씀에 세뇌된 흔적도 없다. 그가 다른 인터뷰에서 했던 말 그대로, "나의 양심은 총을 들 수가 없다"는 것. 이것만이 그가 군대를 거부하고 난민이 되고자 하는 이유였다. 그렇다면 그토록 결연하게 평화를 지양하는 그의 양심은 어디서 온 것일까? 지난 5월 31일 예다씨를 만나 인터뷰했다.
군 복무 거부하면 범법자 취급... 폭력적 시스템
- 언제부터 생명체를 죽일 수 없다는 마음을 갖기 시작했나? "중1 때. 일본 만화가 데츠카 오사무의 만화 <붓다>를 읽었다. 그것을 읽으면서,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과 전쟁에 대한 비판의식이 처음 생겨난 것 같다.
그때부터 만화 주인공에 감정이입하면서 왜 인간은 다른 생명체들을 이유 없이 죽일까에 대한 긴 고뇌가 시작되었다. 모든 동물처럼 생존을 위해, 즉 먹고 살기 위해 혹은 방어하기 위해 다른 동물을 죽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주변에 있는 작은 벌레들을 습관처럼 죽인다. 긴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아무 이유가 없다'였고, 그래서 죽이지 말자고 결정했다. 생명이니까. 나한테 그 생명을 단절 시킬 권한이 없으니까. 그때부터 내 앞에서 파리 한 마리라도 죽이는 사람이 있으면 예외 없이 물었다. "왜 죽여?" 그 대답은 각양각색이었다.
대부분은 그런 질문에 황당해 한다. "그러게, 내가 왜 죽였지?" 혹은 적극적으로 자기방어를 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인간이라는 종에 속하고, 우리를 귀찮게 하고 방해하는 다른 종이 있으면 그들을 제거하는 것이 나의 임무"라고.
모기에 물리면 가렵고 따갑지만, 우리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 그런데도 모기를 죽이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생각했다. 정 귀찮아지면 손으로 모기를 살짝 포위해서 창밖에 놔주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다가 작년에 난민들을 위한 시설에서 지낼 때 빈대를 만났다. 처음에는 견뎠다. 그런데 그것이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더구나 빈대와 함께 지내다 보니 남들과의 신체 접촉도 꺼려졌다. 내가 그들에게 빈대를 옮길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이건 나에게 정말 큰 피해를 주는 경우니까 어쩔 수 없다, 하고 빈대를 죽였다. 약까지 사다가 철저하게. 10년 만에 처음으로 살생했다."
-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실천하는 사람 만난 적 있나? "아니, 없다. (둘 다 웃음)"
- 그럼, 총을 들 수 없다고 느낀 것도 바로 그 마음의 연장선이었나? "그런 셈이다. 고등학교 때 친구, 선생님을 통해 정치의식에 조금씩 눈을 뜨면서 이러저러한 집회에도 참가했다. 거기서 의경을 보았다. 그들이 나라를 지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시민을 폭력으로 진압하는 것을 보면서, 군대라는 것이 국가와 국민을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는 건 거짓말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어 미국을 위해 우리와 상관없는 자들을 위해 싸우는 게 내가 본 우리 군대였다. 나라를 지킨다기보다는 권력자를 위해 합법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집단, 정치적 도구로 이용 당하는 조직이라고 보았다. 거기서 총을 들고 죽이는 훈련을 받는다는 것, 군 복무를 거부하면 범법자로 취급당하고, 감옥에 가야 한다는 그 폭력적 시스템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 유학을 가든 이민을 가든, 나라를 떠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그런데 당신이 선택한 방법은 (적어도 당분간은)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에서 상당히 다르다. 그럴 때 가장 걸리는 건 사실 가족이 아니던가? "부모님을 설득하려 애썼지만, 좀처럼 이해해주지 않으셨다. 정치적 신념을 갖는 건 좋지만, 해야 할 의무들을 모두 행하고 나서 펼치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군대라고 하는 폭력적 시스템이 존재하는데 거기에 아무도 저항하지 않으면, 그것은 그 폭력에 동조하는 거다. 내가 군대에 가서 의문사를 당할 수도 있는데, 그러면 엄마는 어떻게 하실 거냐?"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엄마는 그런 일이 있어도 군에 대해 아무런 요구도 못 하실 거라고 답하셨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달라지셨다. 어느 정도 내 논리에 수긍하시고, 서로 편하게 연락하며 지낸다. 내가 좀 더 정착하면 여동생을 비롯한 가족들이 여기로 오는 것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신다.
사실 나는 한국에서 좋은 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고, 집안 환경이 각별히 좋은 것도 아니다. 한국사회가 요구하는 잘 먹고 잘살기 위한 좋은 조건을 갖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서 내 인생을 발전시키기 위한 새로운 계기를 찾기 위해 다른 나라로 가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다. 새로운 언어도 배우고, 다른 문화도 접하고.
더불어 병역 거부가 난민 허가의 사유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환기할 수 있다면, 군대를 당연한 의무로만 생각하던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문제 제기를 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 아닐까. 이렇게."
- 하필 프랑스라는 나라를 택하게 된 이유는?"대학에서 일본어를 배웠다. 그래서 처음에는 일본도 알아봤다. 그러나 인권 문제에서 한국보다 나을 게 없다는 사실을 금방 알고 바로 접었다. 그러곤… 일단 군대가 있더라도 징병제가 아닌 나라, 아무것도 없이 맨몸으로 시작해야 하니까 사회복지가 잘되어 있는 나라, 그리고 나 같은 사람의 난민 신청을 받아줄 만큼 정치적으로 열려 있는 나라 중에 선택해야 했다. 또 하나 중요한 건 여름이 있는 나라여야 했다. 북유럽이 복지제도가 잘되어 있지만 추운 나라는 싫었다. 그러고 나니 남는 나라가 프랑스. (웃음)"
- 군대 문제가 아니었더라도 한국을 떠났을까? "아마도. 고등학교 때 집회에 여러 번 참가했다. 한미FTA, 광우병 쇠고기, 이주노동자, 그리고 용산참사…. 시위를 하고, 사람들이 죽어도 바뀔 가능성은 적어 보이고…. 한국은 슬픔을 주는 사회라는 생각을 했다."
- 그렇게 해서 프랑스에 왔더니?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기대에 제대로 부응하는 편이다. 예상한 대로 이런저런 복지제도들 덕분에 지금까지 먹고살 수 있었으니까. 첫 1주일은 한국 민박집에서 머물면서 이런저런 정보를 얻었다. 난민 신청자들을 도와주는 기관을 통해 도움을 받았고, 나 같은 난민 신청자들에게 불어를 공짜로 가르쳐주는 분을 만나서 불어도 배울 수 있었다."
- 아? 어디서 불어를 가르쳐주었나? "엠마누엘 선생님이라고, 시민단체(Kolone : 난민 신청자, 이민자 자녀 등을 돕는 시민단체)를 운영하시는 분이 계시다. 티베트, 방글라데시, 이란 등 여러 나라에서 온 나 같은 청년들이 그곳에서 만나서 함께 불어를 배웠다.
불어 수업뿐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정보, 예컨대 숙소와 식사를 공짜로 해결할 수 있는 곳 등등 많은 것들을 도와주셨다. 거기서 불어를 배우면서 귀가 빨리 열린 편이다."
- 노숙한 적도 있다고 들었다. "노숙한 적이 있긴 하지만, 통틀어서 1주일이 채 안 된다. 공항에서 노숙을 좀 해보려고 했는데, 며칠 되니까 비행기 표를 보여 달라더니 나가라고 했다. 그래서 공원에서 노숙하고. 프랑스에는 나처럼 집 없는 사람들을 재워 주는 숙소가 있다. 거기서 여러 번 잤다. 매일 전화를 해서 신청해야 하는 단점이 있긴 했지만.
나중엔 엠마누엘 선생님이 매일 전화하지 않아도 가서 잘 수 있는 숙소를 알려주셔서, 또 거기서도 잤고. 난민 신청자들을 위한 공동 숙소에서 머물기 전까지는 그렇게 지냈다. 여기저기 도와주는 기관들을 알아보고 다니다가 만난 루마니아 친구 앙드레가 정보를 많이 알려주었다. 어디를 가면 밥을 공짜로 주는지 등등. 청소년 쉼터(Halte Jeune), 마음의 식당(Restaurant du Coeur) 이런 데서 밥을 먹곤 했다."
- 만약 난민 허가를 받지 못하면 어떻게 할 작정이었나. "한 번에 안 되면 다시 신청하고, 또다시 신청하고… 그래도 안 되면 그냥 숲 속에 들어가서 혼자 살아야지, 이런 생각이었다."
쌀 한 톨의 소중함, 나무의 기운을 깨닫게 해준 선생님, 선생님 - 인생에서 당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누구인가. "학교에서 만난 선생님들인 것 같다. 좋은 선생님들을 많이 만났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대학을 졸업하고 거의 바로 부임하신 분이었다. 우리에게 쌀 한 톨이 식탁에 올라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정성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지 하나하나 설명해 주면서, 우리 앞에서 급식 판에 있는 모든 음식을 국물 한 방울까지 다 혀로 핥아 드시는 모습을 직접 보여주셨다.
그 잊을 수 없는 광경이 나한테 강하게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이후 나 역시 음식을 버릴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중1 때 만난 문홍만 선생님. 담당 과목은 체육이었는데,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까 그분은 철학 선생님이셨다. 체육 시간에 뒷산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가셔서 나무를 보고, 안게 하고, 나무의 기를 느끼게 하셨다. 그 시간을 정말 좋아했다.
그리고 중2 때 김철언 선생님, 중3 때 조남규 선생님도 좋은 영향을 많이 주셨다. 김철언 선생님은 수학을 가르치셨는데 농사를 짓기도 하셨고, 조남규 선생님은 국사를 가르치시는 전교조 선생님이었는데 당시 한국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정치적 사건들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게 해주셨다."
- 프랑스에 와서 만난 사람 중에 좋은 사람이 많았나, 나쁜 사람이 많았나. (이런 질문을 던진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외국 땅에 당도하는 첫 한 해 동안 사기꾼도 만나고, 험한 꼴을 몰아서 겪기 때문이다. 1년간 환상이 깨지고 호되게 손해도 보면서 이런저런 홍역을 치르고 나면, 비로소 면역이 생기고 그 새로운 사회를 살아갈 지구력을 획득하게 된다.) "고마운 분들을 많이 만났다. 먼저 엠마누엘 선생님. 그리고 처음 머물렀던 한국 민박집 주인분들도 내가 직접 말씀 드리지 않았는데 내 사정을 다른 분들에게 들어 아시고는 일 주일에 한 번씩은 들르라고 말씀해 주셔서 종종 찾아뵙고, 식사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들었다.
난민 자격을 부여 받기 위해서 서류를 제출하고 인터뷰도 해야 하는데, 인터뷰를 잘할 수 있도록 난민지원단체에서 모의 인터뷰를 사전에 했다. 그때 그 민박집의 아들인 분이 통역을 해주셨다. 완벽하게. 실제 인터뷰 때는 한국어를 하는 프랑스 분이 난민사무국의 주선으로 와서 통역을 해주셨다. 나중에 그분한테 들었는데, 처음 서류심사 때 나는 탈락자로 거의 분류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세 시간 동안 인터뷰를 하면서 모든 게 뒤바뀌었다고 했다."
난민사무국을 감동 시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