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오카 관세음사 고구려 담징스님 향기

신 일본 속의 한국문화 답사

등록 2014.05.17 16:01수정 2014.05.17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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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福岡)는 예전에 하카타(博多)로 불리던 곳으로 하카타항(博多港)을 끼고 상업이 번성하여 고대로부터 큐슈의 중심도시로서 역사가 깊은 땅이다. 이곳에 자리한 관세음사(觀世音寺, 칸제온지)는 나라의 동대사(東大寺), 관동의 약사사(藥師寺)와 더불어 일본의 '삼계단(三戒壇, 계를 주는 단)'이 설치될 정도로 이름난 곳이었다.

     
a 관세음사 본당 관세음사 본당(대웅전) 앞 왼쪽 나무 옆에 담징스님의 맷돌이 있다

관세음사 본당 관세음사 본당(대웅전) 앞 왼쪽 나무 옆에 담징스님의 맷돌이 있다 ⓒ 이윤옥


a 관세음사 안내판 백제에 구원병을 보내기 위해 사이메이 왕이 후쿠오카로 건너왔으나 얼마 있어서 죽는 바람에 아들인 천지왕이 어머니의 명복을위해 이 절을 지었다는 안내판

관세음사 안내판 백제에 구원병을 보내기 위해 사이메이 왕이 후쿠오카로 건너왔으나 얼마 있어서 죽는 바람에 아들인 천지왕이 어머니의 명복을위해 이 절을 지었다는 안내판 ⓒ 이윤옥


관세음사를 찾은 것은 이곳에 고구려 담징스님의 발자취를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담징스님에 관한 일본 쪽 사료를 보면 <일본서기> 권22 스이코 18년(610) 봄 3월조에 "고구려왕이 승려 담징과 법정을 보냈다. 담징은 사서오경에 능통하고 채색(그림)을 잘했으며 종이와 먹 만드는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물레방아와 맷돌을 최초로 전했다(高麗王貢上 僧曇徵 法定 曇徵知五經 且能作彩色及紙墨 造 蓋造 始于是時歟)"라는 기록이 있다.

이밖에도 1251년에 나온 <일본고승전요문초(日本高僧傳要文抄)>에 보면 '고구려 승 담징은 외학을 섭렵하고 오경에 밝았으며 610년 3월 법정스님과 함께 건너 왔다'라는 기록이 있다. 담징스님은 머나먼 고구려 땅에서 나라(奈良)지방으로 불법(佛法) 전수를 위해 건너왔다. 그리고 다시 나라의 법륭사에서 후쿠오카의 관세음사로 건너왔다. 법륭사에서 관세음사까지는 무려 650km나 되는 거리로 교통수단이 발달한 지금도 수 차례 차를 갈아타고 8시간이나 걸려야 도달할 수 있는 거리다.

그렇게 먼 곳을 담징스님은 왜 이곳 관세음사로 건너 온 것일까? 담징스님이 후쿠오카 관세음사에 온 것은 단순히 맷돌을 전하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선 담징스님의 가장 큰 흔적인 "맷돌"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으니 그 이야기부터 하자. 맷돌이라고 하면 예전에 어머니들이 두부 따위를 만들 때 쓰던 모습을 떠올리게 되는데 관세음사 대웅전 앞마당에 놓여 있는 맷돌은 크기만도 한국의 시골집에 있던 맷돌의 스무 배나 됨직한 커다란 크기다.

a 담징스님 맷돌 관세음사 대웅전 앞 왼쪽 나무 옆에 담징스님의 맷돌이 있다

담징스님 맷돌 관세음사 대웅전 앞 왼쪽 나무 옆에 담징스님의 맷돌이 있다 ⓒ 이윤옥


맷돌의 유래에 대해 이 절의 주지이자 서남학원대학 문학부교수인 타카쿠라(高倉洋彰)씨의 <태재부와 관세음>(太宰府と觀世音, 1996)기록을 보면 "이 맷돌은 610년 고구려에서 온 승려인 담징이 처음 만든 것으로 이것이 그 실물이다. 이 맷돌은 식용의 가루를 가는 용도가 아니라 가람 건립 때 사용하는 적색안료인 '주(朱)'를 생산하기 위한 것이었다."라고 밝히면서 타카쿠라 교수는 일본 맷돌의 권위자인 미와(三論茂雄)씨의 '다자이부 관세음사 맷돌에 대하여'에 더 자세한 내용이 나와 있다고 덧붙였다.
     
관세음사에는 담징스님의 맷돌 외에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동종(銅鐘)이 있으며 국보급 불상도 많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옛 영화와는 달리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는 한적하기 짝이 없는 고즈넉한 분위기다. 하지만 이 절은 천황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다.

a 관세음사 주춧돌 담징스님이 묵었을 승방터는 주춧돌만 남아있다

관세음사 주춧돌 담징스님이 묵었을 승방터는 주춧돌만 남아있다 ⓒ 이윤옥


a 승방터라는 표지석 승방터라는 표지석

승방터라는 표지석 승방터라는 표지석 ⓒ 이윤옥


당시 사정을 관세음사 기록으로 살펴보자.

관세음사는 큐슈의 중심 사원으로 관내 대사찰이다.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큐슈로 온 사이메이왕은 출병하기 2년 전 이 근처 궁전에서 돌아가셨다. 이 절은 그의 아들 천지왕이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 746년에 지었다.


여기서 독자들은 조금 의아해 할 것이다. 왜 사이메이왕(斉明天皇, 제35대)이 왕궁을 떠나 직접 후쿠오카로 달려와 백제구원군을 보낼 준비를 해야만 했는가를 말이다. 67살의 고령의 나이로 백제구원군을 손수 챙겨야 하는 까닭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백제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이메이왕은 백제구원 출병도 못한 채 객사하고 말았고 아들 천지왕은 즉위식도 미룬 채 출병하였으나 백촌강(지금의 금강하구 언저리)에서 나당연합군에 의해 663년 참패하고 만다. 일본왕실의 종주국으로 받들던 백제의 멸망은 일본으로서는 어지간한 실망이 아니었다.


궁금한 것은 고구려 담징스님이 이 절에 언제 와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관세음사에서는 이 절의 완성을 746년으로 보고 있지만 가마쿠라 시대에 나온 <니츄레키>(二中歴)에는 관세음사 창건을 백봉연간(白鳳年間, 661~683)으로 잡고 있다. 담징스님의 생몰연대는 남아있지 않지만 장수했다면 사이메이왕이 후쿠오카로 건너올 무렵에 이 절에 묵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a 맷돌 앞에 선 글쓴이 담징스님의 맷돌 앞에 선 글쓴이, 맷돌  크기가 보통이 아니다

맷돌 앞에 선 글쓴이 담징스님의 맷돌 앞에 선 글쓴이, 맷돌 크기가 보통이 아니다 ⓒ 이윤옥


안타깝게도 담징스님이 관세음사에서 얼마동안 머물렀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대웅전 앞에는 13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담징스님이 만든 맷돌이 고스란히 남아 그때의 발자취를 말해주고 있다. 서울에서 후쿠오카로 그리고 다시 다자이후까지 가서 또다시 차를 갈아타고 찾아간 관음사!

그 대웅전 앞의 거대한 맷돌이 담징스님의 작품이라니 왠지 스님을 만난 듯 가슴이 뛴다. 법륭사의 금당벽화를 50면이나 그린 대화가이자 일본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다루는 성덕태자의 스승이기도 한 담징스님의 발자국은 나라의 법륭사와 후쿠오카의 관세음사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후쿠오카에 가는 분들은 고즈넉한 관세음사를 찾아 담징스님의 향기를 느껴보는 것도 좋을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주소 : 福岡 太宰府市 觀世音寺 五丁目 6番1 (觀世音寺 '간제온지')
* 찾아가는 길 : 다자이후역(太宰府)에 내려서 걷거나(20분 정도) 역 앞에서 관세음사행 순환버스를 타면 어렵지 않게 갈 수 있다.

이 기사는 한국문화신문 얼레빗과 대자보에도 보냈습니다.
#관세음사 #담징스님 #맷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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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 시인.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한국외대 외국어연수평가원 교수, 일본 와세다대학 객원연구원, 국립국어원 국어순화위원,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냄 저서 《사쿠라 훈민정음》, 《오염된국어사전》,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집《서간도에 들꽃 피다 》전 10권, 《인물로 보는 여성독립운동사》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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