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세월에 안녕을 고했습니다

그동안 만든 작품을 태웠습니다... 열정 담긴 분신들이여 안녕!

등록 2014.08.04 09:39수정 2014.08.04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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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작품 소각할 때의 석양빛

작품 소각할 때의 석양빛 ⓒ 이영미


작품에 부치는 조문


잘 가거라!
내 영혼과 가슴의 열정이 담긴 분신들이여
원래의 처음으로 잘 돌아가거라

원래 나무와 물과 공기와 흙
온갖 생명의 털들이 풀과 물과 빛과 만나
종이가 되고 비단이 되고 먹과 붓이 되었던 재료들

근원이란 아호를 가진 미약한 존재와 만나
종획으로 써내려간 다양한 문자로 표현되었다가
다시 비단으로 표구되어

전국 방방곡곡
때론 일본과 중국에서
문자에 관심가진 천 개의 심안들이
눈빛 빛내며 보았던  꽃같았던 작품들이여!

장엄한 저녁놀빛을 받아 참나무와 함께 불태워져
바람에 실려가는 재가 되어
드 넓은 세상과 하늘을 향해 홀홀히 날아가네


다시 재가 되어 날아가는 모습에
열정이 담긴 예술가의 인생무상도 느껴지고

자연과 물상들이 만물의 합이 되었다가
다시 만물의 시작으로 돌아가는
처음과 끝이 하나라는 것도
새삼 느껴지는 구나!


규격된 종이 안에서 창의성?

a 서예가 이영미 작품 소각 작품들을 소각하기 전에 하나씩 펼쳐놓고 안녕을 고했다.

서예가 이영미 작품 소각 작품들을 소각하기 전에 하나씩 펼쳐놓고 안녕을 고했다. ⓒ 이영미


나는 16세 때부터 붓을 잡고 19살 때부터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19세 때 첫 작품을 할 때는 부산에 살았는데, 어느 스님이 절에서 쓸 '반야심경' 8폭 병풍을 부탁했다. 그 스님이 어느 절에 있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그때의 병풍을 지금 만난다면 내 영혼은 천진한 글씨에 미소를 지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 가슴과 머리는 부끄러움에 그냥 땅바닥을 쳐다 볼 것 같다. 39세 때, <이것이 인생이다>라는 방송에 나갔을 때는 안동 큰 절의 주지스님이 초청해서 나무에 글을 써주기를 부탁했다.

그동안 전국의 웬만한 공모전과 휘호대회는 붓 한 자루 배낭에 넣어서 홀로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바닥에 엎드려서 도전에 도전을 끊임없이 해서 졸업했다. 서울 예술의전당 청년작가전의 칠전팔기가 아닌 팔전구기로 선발돼 졸업했고, 충북도전은 13년 만에 그리고 충남예산을 비롯한 여러 곳도 10년 또는 15년의 세월을 거름해 졸업, 초대작가가 되고 심사위원이 됐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관문인 한 곳을 마침내 최근 24년 만에 졸업했다. 우리나라 공모전이란 것들이 대부분 작품들의 규격을 세로 1미터 이상 또는 2미터로 종획으로 내용을 표현하기를 요구한다. 그리고 외국과의 교류전에 초대받을 때도 주최 측은 읽기 좋은 종획을 요구할 때가 더러 있다. 이렇게 되다 보니 문자를 창의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작가 정신은 전통과 관습이란 그물에 묶일 때가 종종 있었다.

작가를 어부라고 비유한다면(적절한 비유가 아닐지 몰라도), 나는 그물이 필요하면 그물을 쓰고 낚시나 뜰망 또는 손으로도 자유롭게 고기를 잡는 어부가 되고 싶다. 고기를 잡지 않더라도 바다와 노니며 어류를 연구하고 고기와 친구가 되는 창의와 자유의 예술혼으로 세상과 상생하는 작가가 되고 싶다. 이것이 내 소망이다.

작품에 안녕을 고하다

a  공모 및 초대 작품들 소각하기

공모 및 초대 작품들 소각하기 ⓒ 이영미


지난 주말(8월 2~3일)에는 예술의전당 청년작가전에 선발돼 제작했던 가로 세로 2미터의 대형작품을 비롯해 중국에 초대됐던 작품 그리고 해마다 국전에 입상했던 작품들을 비롯해 전국의 다양한 공모전에 입상한 작품과 여러 곳에 초대됐던 작품들을 초상지냈다. 일일이 펼쳐놓고 하나씩 하나씩 되살펴 보고 석양빛 아래 홀홀히 작별을 고했다.

대부분 작품들이 1미터 이상과 2미터의 작품들이라 한 작품을 완성하기 전까지 최소 한 달이상 정성들여 엎드려 제작했다. 이 작품들을 품에 안고 끝까지 가지 않고 태우는 것을 통해, 붓을 잡은 지 40여년이 다 됐지만 작가로 새롭게 태어나 초심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번 주만 해도 이런 저런 초대전 공문이 세 개나 왔다. 작품 크기와 주제와 형식을 정하고 있고, 표구도 작가가 하고 출품비도 적게는 수만, 수십만 원을 작가가 내야 한다. 작가들의 창의성을 위한 전시가 아닌 전시를 위한 전시인 것 같기도 하다.

초대 전시들을 다 받아들이자면 내 월급의 1/3가량이 축나야 할 정도로 나는 재정적으로 넉넉하지 않기도 하지만, 1년에 10개의 작품을 제작하기보다는 단 하나를 제작하더라도 역사에 남는 단 하나의 작품을 만들고 싶다.

언젠가 전북세계서예비엔날레에 초대를 받았을때는 표구도 그쪽에서 하고 작품 제작 종이도 주최 측에서 보내왔다. 그리고 전시가 끝난 후는 작품이 들어간 도록과 표구된 작품을 돌려줬다. 이런 류의 초대전은 만사를 제치고 나는 작품을 정성껏 만들어 보내준다.

정부지원금을 받아서 전시를 기획한다면 마땅히 가난한 작가에게 부담주지 말고 그 돈에 적당한 전시를 기획하는것이 맞지만 그런 초대전은 참으로 희귀하다. 이 땅에서 가난한 예술가의 창의성이 설 자리는 참 비좁은 것 같다. 

좁으면 좁은대로 앞으로 남은 여생은  형식과 시류에 구애받지 않는 나만의 묵향 작품을  천천히 하나씩 만들어가고 싶다. 내 분신과 같은 작품들을 하나하나 재로 자연으로 되돌려 보내면서 나는 다시금 다짐했다. 언젠가 나도 자연으로 되돌아갈 것이니, 한 작품 한 작품 할 때마다 내 마지막 작품이라 생각하고 만들자고.
#서예가 이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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