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몬드 호수스코틀랜드 애딘버러 인근에 있는 로몬드 호수는 둘레 길이가 110Km, 면적 70㎢로 브리튼 섬에서 가장 큰 담수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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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이 70㎢로 여의도 면적의 9배 정도 되는 '로몬드' 호수는 브리튼 섬에서 가장 큰 담수호입니다. 스코틀랜드 최대 도시인 글래스고우 근교에 있는 이곳은 '호수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뛰어난 풍광을 자랑해, 사철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다.
스코틀랜드 민요 '로몬드 호수의 아름다운 기슭'은 바로 이 호수를 함께 거닐던 어느 연인들의 애절한 이별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이별은 바로 전쟁 때문에 벌어졌습니다.
'호수의 여왕'에 서린 슬픔1603년 잉글랜드의 여왕이었던 엘리자베스 1세가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가 영국왕 헨리 7세의 증손뻘이라는 이유로 왕관을 넘겨받게 됩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동시에 통치하는 제임스 1세로 즉위하여 스튜어트 왕조를 열게 된 것이죠.
하지만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동시에 통치하게 된 스튜어트 왕조의 앞길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왕은 신으로부터 그 권력을 부여받았다'는 왕권신수설을 신봉했던 제임스 1세의 아들 찰스 1세는 전제정치를 펴다 올리버 크롬웰의 청교도 혁명으로 목이 잘리게 됩니다. 이후 왕정복고에 의해 찰스 2세가 즉위하였지만, 그의 아우 제임스 2세도 재차 전제정치를 강행하다 1688년 명예혁명으로 왕위를 잃고 프랑스로 쫓겨납니다. 이후 50여 년간 수차례 벌어진 내전의 싹이 트게 되죠. 이른바 '자코바이트의 반란'입니다.
영어 '제임스'의 라틴식 이름인 '야코부스'에서 유래한 자코바이트는 그 이름부터 제임스 2세의 복위, 즉 스튜어트 왕조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좌에 다시 앉히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자코바이트들은 스코틀랜드의 하이랜드 사람들이었죠. (스코틀랜드는 북쪽의 하이랜드와 남쪽의 로랜드로 나뉘어지는데, 이 두 지역은 지리적으로 다를 뿐만 아니라 언어나 습관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제임스 2세는 1689년 루이 14세의 원조로 프랑스군을 이끌고 아일랜드에 상륙, 재기를 꿈꾸기도 했지만 이듬해 '보인'(Boyne)강 전투에서 참패하고 프랑스로 돌아가 10여 년 뒤 상제르망에서 병사합니다. 우유부단하고 용기가 없었던 제임스 2세를 아일랜드 사람들은 '등신 제임스'(영어로는 더 치욕적이게도 'James the shit')라는 별명으로 불렀습니다. 하지만 이 패배도 자코바이트의 반란을 잠재우지는 못했습니다. 수십 년 동안 폭동과 반란, 학살이 이어졌던 것이죠.
1745년 7월, 스튜어트 왕가의 적통을 주장하는 왕자가 도버 해협을 건너와 스코틀랜드 땅을 밟았습니다. 이미 제임스 2세가 죽은 지 오래되었지만, 그의 손자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가 왕관을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스코틀랜드에 상륙한 것이었죠. 굳은 의지에 비해 상황이 썩 좋지는 않았습니다. 무기와 용병들을 실은 배 2척 중 한 척은 영국 해군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은 채로 돌아갔고, 이 때문에 찰스 왕자는 제대로 된 지원도 없이 스코틀랜드에 도착했던 겁니다.
왕자를 맞은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반응도 미적지근했습니다. 이전에 있었던 여러 번의 반란들이 실패한 이후, 외부의 지원이 없으면 봉기가 성공할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던 것이죠. 하지만 왕자의 의지는 확고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타고 온 배를 프랑스로 돌려보내면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내가 왔던 곳으로 돌아갈 생각은 전혀 없소. 나의 충성스러운 하이랜더들이 나와 함께 서리라 믿기 때문이오." 이렇게 또 한 번의 반란이 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