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무릇 전쟁을 좋아하는 생물이라고 한다. 사람은 평화를 바라면서도 평화가 길게 유지되면, 따분함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누구나 할 것 없이 '뭔가 새롭게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일이 없을까?'하며 새로운 것을 찾게 되고, 그것은 곧 전쟁으로 이어진다. 우리 인류의 역사는 이렇게 전쟁과 평화를 반복하면서 발전했고, 잔인한 본성을 이성으로 포장하며 현재 체계를 만들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사람 중 '나는 전쟁을 좋아하지 않아! 그런 건 사이코패스잖아!' 같은 말을 화를 내며 말할지도 모른다. 물론, 모든 사람이 전쟁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모든 사람이 그런 잔인한 일을 좋아하게 된다면, 우리 인류는 서로를 죽이는 일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인류가 지금의 세상을 만들 수 있었던 건 그것보다 더 강한 '이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인간은 전쟁을 일으키며 진화해왔다. 그래서 전쟁은 비교적 편하다. 가만 내버려두면 일어나니까. 그런데 평화는 힘들다. 전쟁으로 자연스레 흐르는 것을 계속 참아야 하니까. '평화는 고통스럽고 전란은 속 편하다.'"
"그건 파스칼?"
"와타나베 선생." 야마노베가 웃엇다.
나오는 말이라고는 죄 남의 말이라는 사실이 기묘하게 느껴졌다. "어떤 인간이든 각자 나름대로 뭔가 말을 남긴 거네." 나는 말했다. 어떤 인간의 발언이 명언으로 불리는지 나로서는 판단이 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한 남자의 발언이 그 당시에는 전혀 먹히지 않고 주위에서 오히려 백안시했는데, 2백년이나 지난 다음 갑자기 평가를 받아 '옛날 사람들은 좋은 말을 많이 했다'며 수많은 인간이 감명을 받는 경우도 봤다.
"전쟁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까요." 오기누마는 강 건너 불구경이라도 하듯 말했다.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전란을 다들 열심히 억제하고 있는 거지. 그 노력이 승리하고 있는 상태를 평화라고 부르는 것뿐이니까. '평화 불감증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걸 유지하고 잇는 건 많은 사람들이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와타나베 선생은 그렇게도 말했어. 불감증에만 걸려 있어서는 결코 평화는 지킬 수 없다는 말도."
"전쟁이 일어나고 수습되고. 얼마 있다 보면 또 전쟁이 일어나고. 그 반복이야." (p380, 사신의 7일)
"인간이 집단을 만들면 확실히 본인들의 힘을 확인하고 싶어해. 그렇지 않더라도 집단이 안정기에 접어들면 필연적으로 그게 시작되지."
"그것?"
"따분함이야."
"따분함?"
"온화한 시간이 길게 이어지면 인간은 못 견뎌. 집단은 그러다 '뭐 재미있는 일 없을까?'라고 한탄하기 시작해."
나는 같은 이야기를 '와타나베 선생'도 했었다는 걸 떠올렸다. 인간은 평화와 안정, 정상이라 불리는 상태를 바람직한 것으로 보면서도 그것이 길게 이어지면 질려서 우울이나 권태를 느낀다고 했다. 평화가 좋다는 걸 알면서도 평화에 질린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전쟁이 바로 거기서 일어나는 거잖아."
그건 좀 난폭한 결론 같았다.
"온화한 일상은 따분함을 낳아. 그 따분함은 불안을 낳고. '이대로 괜찮은가?' 하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집단은 겁을 먹기 시작해. 아니면 따분해하거나. 어쨌든 이런 때 일어나는 건 항쟁이나 전쟁이야."
"그리고 그게 끝나면 또 온화하게."
"그렇지. 역시 인간은 흔들리면서 반복할 뿐이야." (p443, 사신의 7일)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계는 점점 그 이성으로 제어되는 시스템이 조금씩 일그러지고 있다. 과거 세계대전이 발생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여기저기서 군국주의가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있으며, 과거의 영광 속에서 살았던 인물들은 다시 한 번 더 '전쟁'을 이야기하고 있다. 무서운 일이지만, 우리는 이런 모습을 눈만 돌리면 볼 수 있을 정도인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다.
도대체 어느 나라에서 그런 모습이 보이느냐고? 얼마 전에 미국에서 일어난 반이슬람 세력을 규탄하는 극우 집단의 무력시위가 바로 그런 대표적인 모습 중 하나다. 그리고 지금은 잠잠해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이 그런 모습이었고, 독일과 러시아에서 부는 신나치주의에 물든 세대가 그런 모습이고, 일본에서 볼 수 있는 반한 시위를 주도하는 극우 세력의 시위도 그런 모습이다.
게다가 굳이 국외로 눈을 돌리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군국주의에 물든 사람들의 만행을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멀쩡한 대낮에 군복을 입고, 가스총으로 무장한 채 "종북 좌파 세력을 몰아내자!" 같은 말을 외치는 세력이 그런 세력이고, "김구는 대한민국 공로자가 아니다."이라고 말하는 공중파의 한 이사장도 그런 세력이다. 우리나라도 군국주의가 스멀스멀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거다.
이런 모습을 보면, 정말 인류는 전쟁이라는 것을 무척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런 잔인한 행동에 여러 가지 이유를 붙여 정당화시키고, 반성은커녕 어리석은 역사에서 잘못을 깨닫지도 못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그런 건 아니지만, 우리 인류 역사 속의 전쟁은 언제나 그런 세력이 강하게 나오면서 발발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 전쟁이 남긴 아픈 상처를 잊어서도 안 된다.
얼마 전에 아는 형의 소개로 한 권의 소설을 우연히 읽어보게 되었다. 그 소설은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일제강점기 시절에 있었던 일본인의 만행과 소록도에 갇혀 지냈던 한센병을 지녔던 한센인에 대한 이야기였다. 소설임에도 사실을 기록한 듯한 느낌이 전해져 오는 그 책을 읽는 내내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막막함이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슬프다', '감동적이다', '아프다.' 같은 감정에 북받쳐 눈물을 흘린 적이 상당히 많다. 내가 지나치게 감정 이입이 잘 되는 것도 있지만, 책의 이야기에 그만큼 공감을 하면서 책을 읽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읽은 소설은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다. 그저 말로 쉽게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뒤섞여 '아, 아' 같은 신음만 내게 했다.
그 책은 바로, 소재원의 장편소설 <그날>이라는 책이다.
소설 <그날>은 기자 유소영이 한센병을 앓았던 할아버지 서수철을, 기자 한기준이 위안부로 끌려갔었던 할머니 오순덕을, 각자 취재하면서 그들의 입으로 전해 듣는 과거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천천히 시점을 번갈아 가면서 읽을 수 있는 그 이야기는 정말 쉽게 '~했다.' 하면서 후기를 옮길 수 없을 정도였다. 그냥 나는 이야기 속에 있는 아픔과 진실을 알기 위해 꼭 책을 읽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지금 일본 극우의 망언이 얼마나 사람의 못을 박는 행동인지, 한국에서 볼 수 있는 국정교과서 움직임을 비롯한 역사에 대한 망언이 얼마나 빌어먹을 행동인지 알 수 있을 테니까. 아마 <그날>만큼 우리가 가슴이 떨릴 정도로 그 아픈 역사의 현장을 잘 설명하고 있는 책이 또 어디에 있을까 싶다. 꼭 읽어야 할 기록을 읽는 동안 몇 번이나 한숨을 쉬었는지 모른다.
여러 가지를 말하고 싶지만, 딱 두 가지 부분만 인용해서 이 부분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조금 하고자 한다. 이 의견은 책의 저자가 말하는 의견과 관련이 없다. 책을 읽는 동안 내가 느낀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임을 미리 밝혀두는 바이다.
"조선놈이고 일본놈이고 우리에게는 그게 그거다. 어쩌면 조선놈들이 더 할지도 몰라. 적어도 나는 여기에 있는 편이 훨씬 좋다. 죽어라 일만 하면 맞아죽을 일은 없지 않느냐." (p64)
"꿈과 희망."
그가 예수와 같은 인자한 말투로 말했다.
"우리를 찾아오잖여. 이 낙원을 보고 천국을 느끼려고 우리를 찾아오잖여. 보기만 하면 패죽이던 사람들이 이제는 우리가 만든 천국을 당신들의 천국이라 여기며 우리에게 웃어주잖여. 이제는 우리를… 사람 대접 해.주.잖.여."
"할아버지. 어쩌면 일본 사람들도 밉겠지만 노인의 말대로 밖에 사는 일반 사람들도 미웠겠어요."
"그랬지. 오죽하면 우리 스스로가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들을 사회인이라 부르고 우리는 문 씨라고 부르며 이곳에서 똘똘 뭉쳐 살려고 했겄어."
"문 씨?"
"문둥병인게 문 씨제. 사회 사람들에게 가봤자 맞아죽으니 우리 스스로 한가족이라 생각혀고 살려는 뜻이 있었지."
"얼마나 미웠어요? 많이 미우셨죠?"
"어쩌면 말이여. 용서고, 예수님이고, 천국이고 그런 거 때문에 이곳을 만든 게 아닐 수도 있어. 해방 됐으니께 우리가 일군 땅을 빼앗을 사회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뇌물로 만든 것일 수도 있어. 해방 후에 여든여덞 명의 우리 문 씨들이 조선인에게 한꺼번에 뚜들겨 맞아 죽은 사건도 있었으니께. 얼마나 무서웠겄어. 이런 생각 하면 안 되지만, 벽돌공장보다 두려웠던 건 해방 후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일반인들이었을 거여. 우리를 패 버리고, 죽여 버리고 이곳을 빼앗을까봐, 사회가 우리를 봐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을 수도 있겄지. 솔직히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속마음은 그랬던 거 같혀. 그래도 괜찮혀. 지금은 맞지도 않고 우리를 죽이지도 않.으.니.께." (p84)
윗글은 문둥병(한센병)으로 사람들에게 차별 받는 노인이 도망치기로 한 순간에 내뱉은 말과 인터뷰를 하는 할아버지의 말씀이다. 이 말은 일본인을 두둔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잔인해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전쟁이라는 그 다툼 속에서 잔인한 건 군인만이 아니다. 그 다툼 속에는 사람의 본능 그 자체가 '잔인한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 대사는 그 부분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한국 사람이 독하기는 엄청나게 독하지 않은가? 그 독함 때문에 이 정도의 경제 발전을 이루었지만, 여전히 후퇴하는 정책을 고집하는 정부를 지지하면서 지금은 오히려 나라를 망치는 일을 주도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극우 세력으로 나타나면서 과거의 군국주의 향수에 취해 나라를 위기로 몰고 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일본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을 때에 어떤 생각을 했어? 누구든 잘만 다스리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니? 그게 무서운 거야. 일본이 패전해서 물러간다 하더라도 일본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땅을 빼앗기는 거야. 전쟁은 아무것도 아니야. 끝에는 결국 어떤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사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거야. 이렇게 생각을 해볼까? 내가 예전에 고구려 시절을 이야기 했었지? 요동 땅을 넘어서 요서지방의 유성까지가 고구려 땅이었다고. 그런데 어찌 되었지? 지금은 청나라에 속해 있어. 왜 일까? 그 지역에 살았던 조선족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선인이 아닌 중국인으로 스스로를 인정했어. 단군의 후예가 아닌 중화민족 사상을 배우게 된 거야. 단군의 역사를 배우지 않고 중화사상을 배우게 되었기 때문인거야. 고구려는 전쟁을 통해 힘겹게 영토를 확장했지만 청나라는 역사 교육을 통해 민족의 정신을 확장했어. 무력이 아닌 교육이 더 무서운 거야. 몇 대를 걸친 일관된 교육은 전쟁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는 거야." (p244)
이 부분은 일본이 시행했던 민족 말살 정책의 위험성에 대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역사를 잃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 EBS <역사ⓔ>를 보면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고, 그동안 일본과 우리나라가 꽁꽁 감추고 있는 역사의 진실과 필요성을 읽어볼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는 과거 일제강점기와 마찬가지로 또 한 번 역사를 왜곡하려고 하고 있다.
그들의 잘못을 정정하고, 그들의 행동이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다고, 그리고 그들의 행동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었다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역사로 기술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공영방송 이사장의 입에서 "김구는 대한민국 공로자가 아니다." 같은 말이 나오는 것이고, 친일 옹호와 독재 옹호를 하는 세력이 활개를 치며 '군국주의의 향수'를 강하게 뿌리고 있는 거다. 참, 가관이다. 가관.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이미 한국에 거주하는 많은 사람이 한국의 뿌리 깊은 이 부패가 점점 더 나를 기울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일본의 그 군국주의를 조금도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다. 하지만 나는 한국의 군국주의를 지지하고 싶은 마음도 털끝만큼도 없다. 그건 '다른 게' 아니라 분명히 '틀린 것',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다.
아픈 역사 속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오늘날까지도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잘못에 아파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아픔을 감추기보다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 몸을 움직이고, 죽기 전까지 역사를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그들을 이용해 군국주의를 고집하는 세력이 아니라 그들의 아픔이 반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그 어떤 것도 강요할 수 없다. 그저 <그날>이라는 책을 읽어보고,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그날'의 기록을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소설 속의 서수철 할아버지와 오순덕 할머니가 '그날'을 맞이하는 이야기를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아마 글이나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긴 사색을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