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신초등학교. 1919년에는 이 자리에 경찰 주재소가 있었다.
유혜준
지난 토요일 오후, 광명시 노온사동에 있는 온신초등학교를 찾았다. 학교가 쉬는 날이라서 그런지 학교는 고요하다 못해 적막했다. 정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후문 역시 막아놓았다. 교정에서는 사람 그림자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닫아놓은 후문을 열고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너른 운동장은 전날 밤에 내린 비가 미처 빠지지 않아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어디쯤 있을까? 운동장을 둘러보면서 내가 찾고자 한 것은 '3·1 독립만세운동 광명지역 발상지 기념비'였다. 온신초등학교가 광명지역 3·1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곳이기 때문이다. 기념비는 학교 건물 오른쪽 한갓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기념비 앞면에는 '3·1 독립만세운동 광명지역 발상지'라고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발상지에서 일어났던 일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기념비가 세워진 것은 지난 1995년 11월 25일.
1919년, 온신초등학교가 있는 이 자리에는 학교 대신 경찰 주재소가 있었다. 3월 28일, 광명지역 농민들은 자발적으로 몽둥이와 곤봉, 돌 등을 들고 경찰 주재소를 습격했다. 왜?
이정석은 광명지역 3·1 만세운동을 이야기하면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가 광명지역 3·1 만세운동 발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1919년 3월 27일 밤, 당시 소하리에 살던 이정석은 노온사리에 있는 경찰 주재소 앞에서 홀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다른 곳도 아니고 주재소 앞에서 만세운동을 벌였으니, 주재소에 잡혀 들어가는 것은 당연했다.
3월 28일, 이정석이 주재소에 구금되자 아버지 이종원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맏아들이 주재소에 잡혀들어 갔는데 손 놓고 있을 아버지는 아무도 없을 터. 이종원이 도움을 받으려고 달려간 곳은 최호천의 집이었다. 당시 최호천은 배재고등보통학교 학생으로 3·1 만세운동으로 시작된 시위 때문에 휴교령이 내려져 집에 돌아와 있었다.
최호천은 아들을 구해달라는 이종원의 호소를 받아들였다. 밤에 사람들을 모아서 주재소로 몰려가서 이정석을 구해주겠다는 약속을 했던 것이다. 최호천과 함께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재학하고 있던 윤의병 역시 소식을 듣고 이정석을 구하기 위해 나섰다.
3월 28일 밤, 최호천은 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주재소로 가서 이정석을 구하자고 제안했고, 동네 사람들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최호천을 따라 이정석을 구하기 위해 나선 이들은 백여 명에 이른다. 윤의병은 내가리대리의 동민 백여 명을 더 모았다. 시위에 가담한 사람은 200여 명으로 불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