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에 있다.
김종성
평생 동안 광해군을 괴롭힌 질병 가운데서 대표적인 것은 화증(火症, 화를 잘 내는 증세), 울열증(속이 답답한 증세), 안질 등이다.
광해군 2년 4월 23일자(양력 1610년 6월 14일자)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광해군은 영의정 이덕형과의 대화에서 '나는 어려서부터 열이 많아 화증과 울열증을 앓았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또 광해군 10년 윤4월 22일자(1618년 6월 14일자)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광해군은 내의원 의사들과의 대화에서 '오랫동안 안질을 앓았지만, 효과적인 처방을 받지 못했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화증·울열증·안질, 이 세 가지를 관통하는 공통점은 체내의 열이다. 몸 안에 열이 많으면 화증이나 울열증이 생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눈에도 영향을 미쳐 안질이 생길 수도 있다. 몸 안에 열이 많은 광해군이 안질까지 겪었다는 것은, 그의 체내에 있는 열이 눈에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체내의 열 때문에 울컥하기도 하고 화도 잘 내고 안질까지 겪었다는 것은 광해군의 콤플렉스가 몸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뜻하는 동시에, 그가 드라마 속의 모습과 달리 다정다감하거나 원만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어려서부터 차별을 받아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이 몸 안의 열 때문에 울컥하기도 하고 화도 잘 냈다면, 성격상의 결함이 주변 사람들의 눈에 포착됐으리라고 판단하는 게 경험법칙에 부합될 것이다. 게다가 그런 사람이 안질까지 겪었다면, 남들에게 편안한 인상도 주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콤플렉스가 있거나 화증·울열증이 있더라도, 이런 것이 성격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정신수양을 통해 이런 것들을 극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광해군은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 점은, 광해군이 학문을 게을리 하는 편이었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당시의 대표적 학문인 성리학은 지적 탐구 못지않게 인격 수양을 중시하는 학문이었다. 그런데 광해군은 다른 임금들에 비해 성리학 공부를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다.
광해군이 임금이 된 뒤에 한동안 문제가 됐던 것은 그가 경연이란 학술 세미나를 제대로 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군주의 학문적 수양을 별로 중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건강 문제 때문에 경연을 제대로 열지 못한 측면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학문적 열정이 부족했던 측면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당연한 언급이 되겠지만, 몸이 허약하다고 해서 학문을 열심히 할 수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광해군이 학문적 수양을 별로 중시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인격 도야를 통해 콤플렉스를 극복했을 가능성이 그다지 많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콤플렉스나 건강문제가 그의 성격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실제 모습은 원만하거나 다정다감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을지도 모른다.
광해군은 개혁정치와 실리외교를 추구한 훌륭한 군주다. 또 성격이 좋다고 해서 반드시 훌륭한 업적을 남기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광해군의 성격이 어떠했든 간에 그것은 광해군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 글에서 강조하는 것은 그가 드라마에서 묘사된 것처럼 그렇게 '젠틀'한 사람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성격상의 문제를 가진 개혁가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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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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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군주' 광해군은 왜 성격이 좋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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