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 금성산성 입구. 금성산성은 김덕령 부대가 훈련하던 곳이었다.
김종성
그 뒤에도 선조는 계속해서 김덕령을 신임했지만, 김덕령이 '무슨 일이든 벌일 수 있는 군대'를 갖고 있다는 점과 광해군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점을 항상 잊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던 차에 김덕령에 대한 선조의 속마음을 드러내는 결정적 사건이 발생했다.
전쟁 중인 1596년 왕족 출신인 이몽학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몽학은 전쟁의 혼란을 틈타 충청도 홍산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김덕령은 이몽학의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고 출동했다가, 반란이 조기에 진압되는 바람에 회군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체포된 반란군 간부인 한현의 입에서 김덕령의 이름이 나왔다. 김덕령도 자기네 사람이라는 진술이 나온 것이다. 하지만 한현의 진술이 의심스러웠다는 점은 "의병장 곽재우도 나의 심복"라는 황당한 진술에서도 잘 드러난다. 별다른 증거도 없이 유명 의병장들을 거론했던 것이다.
반란군 간부의 입에서 김덕령의 이름이 나왔다는 보고를 받자, 선조는 한편으로는 놀라움을 표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흥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잘못하면 김덕령이란 인재를 잃을 수도 있다'는 걱정을 하기보다는 '김덕령을 체포하지 못하면 어떡할까?' 하는 걱정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김덕령 체포조가 혹시라도 김덕령을 당해내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김덕령은 순순히 체포에 응했고, 선조 임금이 그에 대한 조사를 직접 지휘했다. 그런데 선조는 진상을 확인하기보다는 처형을 서두르는 데만 관심을 보였다. 그는 한현의 진술 외에는 구체적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김덕령에 대한 처형을 서둘렀다. 유성룡 등이 보강 수사를 건의했지만, 선조는 아랑곳없이 절차를 진행했다.
증거가 나오지 않자 선조는 여러 날 계속해서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고문이 어찌나 심했는지, 무릎 아래 정강이뼈가 부러질 정도였다. 그래도 김덕령이 자복하지 않자 선조는 한층 더 가혹한 고문을 지시했고, 고문을 받는 도중에 김덕령은 눈을 감고 말았다.
선조가 못난 기질을 갖고 왕권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난중잡록>에서는 김덕령이 죄가 없는데도 억울하게 죽었다며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소식을 들은 일본군 진영에서는 환호성이 터지고 파티가 벌어졌으며, 일본군 간부들은 "이제 전라도·충청도는 걱정이 없다"며 환영을 표시했다고 <난중잡록>은 전한다.
선조는 인재를 시기하고 가볍게 여기는 군주였다. 김덕령은 그로 인한 희생물이었다. 인재에 대한 선조의 질투심이 낳은 희생물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인재를 시기하고 괴롭혔는데도, 선조는 일본군을 몰아내고 왕권을 굳건히 지켰다. 그랬으니 그로서는 '인재를 소중히 여기라'는 <삼략> 등의 메시지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선조 같은 임금 밑에서 조선 백성들이 목숨을 걸고 싸운 것은 임금에 대한 충성심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스스로 지키겠다는 열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시대 사람들이 삶에 대한 강렬한 애착을 발휘한 덕분에, 선조는 못난 기질을 갖고도 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선조는 속 좁은 지도자였지만, 그런 의미에서 대단한 행운아였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3
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